2014년 11월 11일 화요일

고대 - 삼국지 위서 동이전 서

 왕제에 이런 말이 있다.

  동방을 이라고 한다. 이란 저이니 어질고 물건 살리기를 좋아해서 만 가지 물건이 땅에 뿌리 박고 난다는 말이다. 그런 때문에 그들은 천성이 유순해서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기가 쉬워서 심지어 군자는 죽지 않는 나라까지 있다.

  이는 아홉 가지 종류가 있다. 그것은 견이, 우이, 방이, 황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이다. 그런 때문에 공자도 구이에 살고자 했다.

  옛날 요 임금이 희중에게 명하여 우이에 자리를 잡으라 하고 이곳을 양곡이라 했다. 대개 이곳은 해가 돕는 곳이다.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어서 오랑캐들이 반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소강제 이후로 세상 사람들이 왕의 덕화에 복종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그들을 왕의 문에 손으로 모셔다가 그들의 음악과 춤을 듣고 보았다.

  걸은 포악하고 사나와서 모든 오랑캐들이 안으로 침략했다. 이것을 은탕은 혁명을 일으켜 쳐서 안정시켰다. 중정에 이르자 남이가 침략해 왔다. 이로부터 오랑캐들이 혹 복종할 때도 있고, 혹 반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三백여 년을 지낸 뒤에 무을이 쇠폐해지자 동이가 몹시 침입해 왔다. 이에 드디어 땅을 쪼개어 주고 회대로 옮긴 다음 차차 복판에 살기 시작했다.

  무왕이 주를 치자 숙신이 와서 석노와 고시를 바쳤다.

  관숙, 채숙이 반하자 주는 오랑캐들을 불러 유인해다가 주공이 이를 정벌하고 드디어 동이를 평정했다.

  강왕 때에 숙신이 다시 왔고, 뒤에 서이가 참람되게 왕호를 일컫고 구이를 이끌고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황하위까지 이르자 목왕은 그 세력이 바야흐로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쪽 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주장하게 했다.

  언왕은 황지 동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땅이 五백 리였다. 여기에서 인의를 행하여 백성을 다스리니 육지로만 와서 조회하는 자가 삼십육국이나 되었다.

  목왕은 뒤에 기, 녹같은 명마가 끄는 수레를 얻어 조부로 하여금 말을 몰게 한 다음 초나라에 말하여 서를 치게 하는데 하루 만에 초나라 땅에 다다랐다. 이리하여 초의 문왕은 크게 군사를 내어 서를 멸망시켰다.

  언왕은 어질기만 하고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차마 그 사람과 싸울 수가 없어 마침내 패하고 말았다. 이에 북쪽으로 팽성 무원현 동쪽 산 밑에 이르러 보니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만 명이나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산을 서산이라고 이름했다.

  여왕은 무도해서 회이가 침입해 왔다. 왕은 괵중에게 명하여 이를 치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라히여 선왕이 다시 소공에게 명하여 이를 쳐서 평정했다.

  유왕에 이르러 몹시 음란하자 사방의 오랑캐들이 다투어 침입했고, 제환공에 이르러서 패업을 이루어 이들을 물리쳤다.

  초영왕이 신에서 제후들을 회합시킬 때 역시 와서 회맹에 참례했다. 뒤에 월나라가 낭야로 옮기자 이들은 함께 가서 정벌하고 나서 드디어 남을 업신 여기고 사납게 굴었다.

  제후들이 조그만 나라들을 침략해 멸망시키고 진나라가 육국을 통일하자 그 회사에 있는 오랑캐들은 모두 흩어져서 백성의 집을 만들었다.

  진섭이 군사를 일으키자 천하가 허물어지니 연나라 사람 위만이 피하여 조선으로 가서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런 지 백여 년이 되자 무제가 멸망시켰다. 이에 동이가 비로소 서울에 통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왕망이 왕위를 빼앗아 차지하자 맥 땅 사람들이 변방을 침략하다가 건무 초년에 다시 와서 조공을 바쳤다. 이 때 요동태수 제동이 북쪽 지방을 위엄으로 억누르니 그 소문이 바다 밖에까지 진동했다. 이에 예맥, 왜, 한이 천 리 밖에서 와서 조헌했다.

  죽은 장화 이후로는 사신을 조빙하는 것을 서로 유통했고, 영초에 이르러서는 어려운 일이 많아서 비로소 들어와 침략하고 노략하기 시작했다.

  환제와 영제가 옳은 정치를 잃자 이것은 점점 번져 나갔다. 중흥한 뒤로는 사방 오랑캐들이 손으로 왔고, 비록 때로 괴이한 일이나 반하는 일이 있어도 사역이 끓어지지 않았다. 그런 때문에 나라의 풍속과 풍토를 대강이나마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동이들은 그곳 토착한 백성들을 데리고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어 혹은 변관 쓰고 비단옷 입으며, 그릇은 조두를 썼다. 그러므로 이른바 중국이 예를 잃었기 때문에 이것을 사이에 구했다는 것이다.

  대체로 만이와 융적을 통틀어 모두 사이라고 한 것은 마치 공후백자남을 모두 제후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고대 - 한서 조선전 (고조선)

  조선왕 만滿은 연나라 사람이다. 연燕나라가 전성할 때로부터 일찌기 진번조선眞蕃朝鮮을 침략해서 자기 나라에 붙여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었다.

  그 뒤에 진나라가 연을 멸하자 요동 경계 밖을 소속시켰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그곳이 멀어서 지킬 수 없다고 해서 다시 요동의 옛날 요새를 수축하여 패수에 이르기까지로 경계를 삼아 연에 붙였다.

  연왕 노관盧 이 반해서 흉노로 들어가자 만은 망명해 달아났다. 그는 무리 천여 명을 모아가지고 머리에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달아나 새방 밖으로 나가 패수를 지나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에 살았다. 여기에서 그는 차츰 진번조선 오랑캐와 옛날 연나라, 제나라에서 망명한 자를 모아서 왕노릇하고 왕검에 도읍을 정했다.

  마침 효혜고후孝惠高后 때를 당하여 천하가 처음 정착되자 요동태수는 곧 만에게 외신 자리를 주어서 새방 밖에 있는 오랑캐들을 막아 변방에 도둑질하지 못하게 하고, 또 오랑캐의 군장君長이 천자께 들어와 뵙겠다고 하면 이를 금지하지 말도록 약속하려고 조정에 알렸더니 천자는 이를 허락했다.

  이렇게 되어 만은 군사의 위엄과 재물을 얻을 수가 있어 이것으로 그 곁에 있는 조그만 고을들을 침략하여 항복받으니 진번, 임둔이 모두 그에게로 붙었다. 이리하여 땅이 수천 리가 되었고, 이로써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 우거에게 이르렀다.

  그러나 그가 유인해 온 한나라에서 도망 온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도 한 번도 천자에게 들어가 보는 일이 없었다. 진번과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고자 해도 또 그에게 막혀 통하지 않았다.

  원봉元封 2년에 한나라 사신 섭하涉何가 그를 책망하고 타이르려고 갔으나, 우거는 종시 천자의 조서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하何는 돌아가려고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랐다. 하는 갑자기 말을 달려 자기를 전송하려고 따라 나온 조선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즉시 패수를 건너 새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는 돌아가서 천자에게 보고하기를, "조선 장수를 죽였습니다."하니 천자는 그의 한 일을 가상히 여겨 아무런 말도 묻지 않고 하를 遼東東部都尉로 삼았다.

  이로부터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내어 습격해서 마침내 하를 죽였다. 이것을 보고 천자는 죄인들을 모집해다가 조선을 쳤다. 그해 가을에는 또 누선장군 양복楊僕을 보내서 제나라로부터 발해로 건너가니 군사가 五만 명이었다.

  한편 좌장군 순체荀 는 요동으로 나가서 우거를 쳤다. 이에 우거는 군사를 내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은 요동 사람을 군사로 많이 거느리고 가서 먼저 공격했으나 패해서 흩어졌다. 도망해 되돌아온 자도 많았는데, 이들은 모두 법에 저촉되어 참형에 처하여졌다.

  누선樓船은 군사 7천 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險에 도착했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은 것을 탐지하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의 군사는 패해 달아났다. 이에 장군 양복은 그 군사들을 잃고 산 속에 숨은 지 10여 일에 차츰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모았다.

  좌장군은 조선 패수 서쪽 군사를 쳤으나 깨치지 못했다. 천자는 두 장수가 모두 싸움에 이롭지 못하다 해서 이에 위산衛山을 시켜 군사의 위세를 보이고 가서 우거를 타일러 보라 했다.

  우거는 사자를 보자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하고 항복하기를 원하여 [속여서 우리를 죽일까 두려워했더니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니 칭컨대 항복하겠습니다]했다.

  이리하여 태자를 보내서 들어가 사례하고 말 5천 필과 군사 먹일 양식을 바치게 하여 무리 만여 명이 병기를 가지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했지만,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에게 변이 있을까 의심이 났다. 그들은 [태자가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은 마땅히 병기를 갖지 말라]했다.

  한편 태자도 역시 사자나 좌장군에게 거짓이 있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드디어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위산이 이 사실을 천자께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베었다.

  이 때 좌장군은 패수 위에 있는 군사를 깨치고 앞으로 성 밑에 이르러 성 서쪽과 북쪽을 포위했다. 누선도 역시 여기에 달려가 성 남쪽에 군사를 주둔시키니 우거는 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이리하여 두어 달이 되도록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좌장군은 본래 천자를 모시어 왔고 장차 연나라의 대를 이을 터이므로 몹시 우쭐거리는 판인데, 이 때 싸움에 이기고 보니 군사들까지 교만한 기운이 많았다.

  한편 누선은 군사를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 이미 여러 번 패한 일이 있고, 또 먼젓번에 우거와 싸울 적에도 곤욕을 받아 군사를 잃은 터여서 그 군사를 잃은 터여서 그 군사들은 모두 두려운 마음을 가졌고, 장수들도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었다.

  이리하여 비록 우거를 포위는 했어도 언제나 화친할 의사를 가졌다.

  이 때 좌장군이 공격을 서두르자 조선의 대신들은 비밀히 사람을 보내서 사사로이 누선에게 항복하기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런 말이 오고 가기만 하고 아직 결정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까닭에 좌장군이 자주 누선을 보고 조선군과 싸울 것을 말했지만, 누선은 조선이 항복한다는 약속을 이루고자 하여 여기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또 좌장군도 역시 몰래 사람을 시켜 틈을 타서 조선으로 하여금 항복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조선은 이미 마음을 누선에게 주고 있었으므로 좌장군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 이러고 보니 두 장수들은 서로 마음이 맞을 리가 없었다.

  좌장군은 혼자 생각하기에, 누선이 전에는 군사를 잃은 죄가 있었고, 이제 또 조선과 사사로이 좋게 지내는데도 조선이 여전히 항복하지 않고 있음을 보면 혹시 반간反間하는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여 자기 역시 쉽게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천자는 말하기를, [전에 장졸들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기로 위산을 시켜 우거를 타일러 항복하게 했더니 일을 매듭 짓지 못하여 좌장군과는 계획이 서로 어긋나서 마침내 약속을 깨치게 되었었다. 그러던 터여서 이제 두 장수가 성을 포위했는데도 일이 이상하게만 되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오래도록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했다. 이에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서 가서 일을 바로잡도록 해서 편의대로 처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공손수가 도착하자 좌장군은 말하기를, [조선이 함락된 지 이미 오랬을 것이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누선이 여러 번 약속을 어기고 싸우지 않은 때문이오] 하고 자기의 뜻을 낱낱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좌장군은 다시 수遂에게 말하기를, [이제 형세가 이렇게 되었는데도 조선을 취하지 않으면 큰 해가 될까 두렵소. 그것은 비단 누선뿐만이 아니라, 그가 또 조선과 함께 군사를 합쳐 우리를 치러 올 것이오] 했다.

  이 말을 듣자 수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절부節符를 가지고 누선장군을 불러 좌장군 군중에 들어가 일을 계획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놓고 즉시 좌장군 휘하 군사를 시켜 누선장군과 그 군사들을 잡아 결박하게 하고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했다. 이리하여 천자는 수의 의견을 쫓았다.

  이리하여 좌장군은 마침네 두 군대를 합치게 되었다. 그리고 급히 조선을 치기 시작했다. 이 때 조선 정승 노인路人과 한도韓陶, 니계상尼谿相 삼參, 장군 왕협王  등이 서로 의논하기를, [처음에 우리가 누선에게 항복하려던 것이 이제는 누선이 잡혀 버리고 홀로 좌장군이 군사를 합쳐 이제 싸움이 더욱 급하니 그를 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했다.

  그러나 왕은 또 즐겨 항복하려 하지 안흥므로 한도와 협, 노인은 모두 도망해서 한나라에 항복했는데, 그 중에 노인은 중도에 죽었다.

  원봉 3년 여름에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했다. 그러나 王儉城만은 함락되지 않고 있었다.

  이 때 죽은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는 또 거듭 관리들을 공격했다. 이리하여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長과 항복한 정승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들을 달래고 성기를 베니 이로써 드디어 조선이 평정되었다.

  이에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사군四郡을 두고 삼參을 봉하여 획청후 淸侯를 삼고, 한도韓陶로 추저후秋 侯를 삼고, 협으로 평주후平州侯를 삼고, 장長으로 기후幾侯를 삼았다.

  한편 최근 그 아버지가 죽었고, 자못 공로가 있다 하여 저양후沮陽侯를 삼았다.

  좌장군을 불러 들였으나 앉아서 자기들의 공로를 다투다가 서로 미워하노라 계교를 어그러뜨렸다 해서 기시棄市의 형에 처했고, 누선장군도 역시 군사가 먼저 열구列口에 이르렀으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옳은데 제 맘대로 먼저 군사를 내었다가 잃어버린 것이 많았다 하여 의당 베일 것이나 용서해서 서인庶人을 만들었다.

  찬贊에 이렇게 말했다.

   초나라 옛 조상 때는

   역대로 그 땅이 있었데.

   주나라 아무리 쇠했어도

   초나라 땅은 사방 五천 리는 되어

   구천句踐은 여기서 패업覇業 이루었네.

   진나라가 제후諸侯를 멸했어도

   오직 초나라에는 진왕 王 있었네.

   한나라가 서남쪽 오랑캐 베어도

   유독 진왕만은 사랑받았네.

   동東오가 나라 없어져 옮겨도

   모든 유왕과 거고들은

   오히려 만호후가 되었네.

   세 방위 모두 열리니

   모두 일 좋아하는 신하일세.

   서남쪽 오랑캐는 당몽 사마상여에게서 일어나고

   양오는 엄조 주매신에게서 어일났네.

   조선은 섭하로 해서 대마다 융성해졌고

   이로써 성공하여 부지런해졌네.

   태종의 사랑하고 위로한 은덕 보면

   이 어찌 예의로 부르고 덕으로 인도한 게 아니라 하랴.(漢書)

고대 - 한서 지리지 - 고조선

 진秦나라가 설치하여 유쥬幽州에 예속시켰음. 55,972戶. 인구는 272,539人. 현縣은 18.

  ○ 요동군遼東郡(秦나라때 설치함. 遼東城 동남부의 遼河 동쪽임)

  (1) 양평襄平: 목사관牧師官이 있음. 망莽은 이것을 창평昌平이라고 했다.

  (2) 신창新昌

  (3) 무려無慮: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렸다. 사고師古는 말하기를, 무려는 즉 의무려醫無閭임.

  (4) 망평望平: 대요수大遼水는 새방 밖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 갔다. 물의 길이는 1,250리임.

  (5) 방房

  (6) 후성侯城: 중부도위中部都尉가 다스렸다.

  (7) 요수遼隊: 망莽은 이것을 순목順睦이라고 했고, 사고師古는 대隊를 수遂라고        발음했다.

  (8) 요양遼陽: 대양수大梁水는 서남쪽으로부터 흘러 요양에 이르러 요遼로 들어        갔음. 망은 이것을 요음遼陰이라고 했다.

  (9) 검독儉瀆: 응소應邵가 말하기를, 이것은 조선 왕 만滿이 도읍했던 곳이다.         물의 험한 것을 의지해서 자리잡았다 해서 검독儉瀆이라 했다. 신찬臣瓚은        말하기를, 왕검성王儉城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이곳부터 검독        이라 했다 고 했다. 사고師古는 찬瓚의 말이 옳다고 했다.

  (10) 거취居就: 실위산室僞山과 실위수室僞水가 여기에서 나왔으니, 북쪽으로 양         평襄平에 이르러 대양大粱으로 들어갔음.

  (11) 고현高顯

  (12) 안시安市

  (13) 무차武次: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리는 곳. 망莽은 무차를 항차桓次라고          했다.

  (14) 평곽平郭: 철관鐵官과 염관鹽官이 있음.

  (15) 서안평西安平: 망은 말하기를 이것을 부안평이라고 했다.

  (16) 문文: 망은 이것을 수정受亭이라고 했다.

  (17) 번한番汗: 패수沛水는 새방 밖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응소         應邵는 말하기를, 한수汗水가 새방 밖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고 했다.

  (18) 답씨沓氏: 응소는 말하기를, 이것을 답수라고 했다.



 ○ 현도군玄 郡(전한前漢 무제武帝가 세움.옥저의 옛 땅임. 고구려 광개토왕 때      고구려에 병합됨)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封 4년에 열었음. 45,000戶. 인구는 221,845명. 현縣은 셋      이다.

  (1) 고구려: 요산遼山은 요수遼水가 여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갔음.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어 서남쪽으로 새방        밖을 지났다. 응소는 말하기를, 이것을 고구려호라고 했다.

  (2) 상은대上殷臺: 망은 하은下殷이라고 했다.

  (3) 서개마西蓋馬: 마자수馬 水는 서북쪽으로 흘러 들어갔고,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다. 군郡 둘을 지나고 길이가 2,100리        가 된다. 망은 이곳을 현도정玄 亭이라고 했다.



 ○ 낙랑군樂浪郡

    무제 원봉3년에 열었음. 망은 이곳은 낙선樂鮮으로서 유주幽州에 붙였다고 했      다. 응소는 이곳이 옛날 조선국이라 했다. 62,812戶요, 인구는 406,748人. 운장      雲 이 있음. 현縣은 25.

  (1) 조선朝鮮: 응소가 말하기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했다.

  (2) 남감

  (3) 패수沛水: 물이 서쪽으로 흘러 증지增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다. 망은 이        곳을 낙선정樂鮮亭이라고 했다.

  (4) 함자含資

  (5) 대수帶水: 서쪽으로 흘러 대방帶方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다.

  (6) 점제 蟬

  (7) 수성遂成

  (8) 증지增地: 망은 이곳을 증토增土라고 하였다.

  (9) 대방帶方

  (10) 사망駟望

  (11) 해명海冥: 망은 이곳을 해환海桓이라고 했다.

  (12) 열구列口

  (13) 장삼長岑

  (14) 둔유屯有

  (15) 소명昭明: 남부도위南部都尉가 다스림.

  (16) 누방鏤方

  (17) 제해혼미提奚渾彌

  (18) 탄열呑列: 분여산分黎山, 열수列水가 여기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흘러 점         제 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는데 길이가 820리이다.

  (19) 동이東 

  (20) 불이不而: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림.

  (21) 잠태蠶台

  (22) 화려華麗

  (23) 사두매邪頭昧

  (24) 전막前莫

  (25) 요조夭祖

   연燕나라 땅은 미尾와 기箕(28숙宿의 하나. 모두 동방에 있는 별 이름으로 여기에서는 동쪽을 말함)에서 나뉜 들이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하고 나서 소공召公을 연에 봉했다. 그 뒤 36대가 되는 동안 그는 육국六國과 함께 왕이라고 일컬어, 동쪽으로는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 요동이 있고, 서쪽으로는 상곡上谷, 대군代郡, 안문雁門을 가졌으며, 남쪽으로는 탁군 郡의 이용성과 범양을 얻었고, 북쪽으로는 신성, 즉 옛날의 안탁현, 양향, 신창과 발해의 안차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연나라에서 나뉜 땅이다. 낙랑, 현도도 역시 여기에 소속되어야 할 것이다.

  연이 왕이라고 일컬은 지 십대가 되었을 때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멸하고자 했다. 이 때 연왕燕王의 태자 단丹이 용사 형가荊軻를 보내서 서쪽으로 가서 진왕秦王을 찔러 죽이려 했으나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베임을 당했다.

  이리하여 진나라에서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멸해 버렸다. 이 당시의 계 는 남으로 제나라와 조나라에 통하며 발해와 갈석蝎石 중간에 있는 한 도회都會였다.

  처음에 태자 단은 손님으로 용사들만 집에서 기르고 있어 후궁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백성들도 거기에 화하여 습관이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러하다. 손님들을 맞으면 자기 아내를 주어 모시고 자도록 하고, 시집 가는 첫날 밤에도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것을 도리어 영화롭게 여겨 왔는데, 뒤에는 차츰 조금씩 덜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종시 아주 고치지는 못했다.

  이리하여 그들의 풍속은 어리석고 사납고 생각이 적어 경박하고 위엄이 없었다. 그래도 역시 장점도 있기는 했으니, 남의 급한 일을 보면 용감하게 뛰어드는 성질이 있었으니 이것은 곧 단의 남긴 풍도이다.

  상곡上谷으로부터 요동에 이르기까지 땅은 넓고 백성은 드물어 자주 오랑캐들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풍속은 조趙나라 시대와 서로 비슷한데 생선과 소금.대추.밤 같은 것이 풍족히 났다.

  북쪽으로는 오환烏丸, 부여夫餘와 틈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진번의 이로움을 사 들이고 있었다. 현도와 낙랑은 무제 때 설치했는데, 이것은 모두 조선, 예맥濊貊, 구려만이句驪蠻夷이다.

  은殷나라의 도道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을 예의에 힘쓰고, 농사짓고 누에 쳐서 길쌈 하도록 가르쳤다. 또 낙랑의 조선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팔조목을 만들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받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그것이 남자일 경우에는 그 집 남자 종을 만들고 여자일 경우에는 역시 여자 종을 만든다. 자기가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 앞에 오십만 냥을 내게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될 때도 풍속에 역시 그들은 부끄러움을 씻지는 못한다. 아내를 얻는 데는 원수를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그 백성들은 종시 도둑질을 하지 않아서 대문을 닫고 자는 법이 없었다.

  여자들은 모두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 그 지방의 농사 짓는 백성들은 대나무 그릇에 음식을 먹고, 도시에서는 관리나 장사꾼들을 본받아서 왕왕히 술잔 같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는다.

  군에서는 처음에 요동에 가서 관리를 데려 왔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물건을 숨기거나 감추어 두는 법이 없는 것을 보았으나 장사꾼들이 오면 밤에 도둑질을 하게 되어 풍속이 차츰 박해갔다.

  지금에 와서는 법으로 금하는 것이 더 많아져서 육십여 조목이 되었으니, 어질고 착한 것의 감화야말로 귀한 것이다.

  그러나 동이東夷는 천성이 유순해서 세 지방 밖의 사람들과 다르다. 그런 때문에 공자가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여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에 살고자 한 것이 까닭이 있다.

  대체로 낙랑 바다 속에는 왜인倭人들이 살고 있어 나누어 백여 나라가 되는데 이들은 해마다 와서 물건을 바치고 뵙는다고 한다. 그 지방은 위危 사도四度로부터 두 육도六道에 이르는 곳을 석목析木의 다음 위치라고 하는데, 이곳은 연燕나라에서 나뉜 곳이다.(漢書)

고대 - 사기 조선전 (고조선)

장안(長安)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의 세 물이 있어 이것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고 했다. 아마 낙랑(樂浪)이나 조선은 여기에서 이름을 딴 것인 듯 싶다. 조선(朝鮮) 임금 만(滿)(漢書에 보면 滿은 燕人으로 성은 衛이다. 조선왕을 쳐서 없애고 자기가 왕노릇을 했다고 했다)이란 자는 옛날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가 전성할 때(연나라가 전성할 때란 6나라 중에 연나라가 전성해서 항상 두 나라를 침략하여 자기 나라에 붙일 때를 말함)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과 조선을 침략하여 자기 나라에 붙이고 관리를 두고 장세( 塞)(국경에 있는 요새)를 쌓았었다.

   진(秦)이 연을 멸하자 요동(遼東) 밖 변방을 자기 땅에 붙였다. 그러나 한(漢)이 일어나자 지방이 멀어서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요동의 옛날 요새를 수리하여 패수浿水(地理志에 보면 浿水는 요동 밖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낙랑현을 거쳐 서쪽으로 바다로 들어갔다고 씌어 있다. 즉 지금의 압록강)에 이르러 경계를 삼아 연에 붙였다. 연왕燕王 노관盧 (漢의 豊땅 사람. 高祖와 같은 고향으로서 같은 날에 났다. 고조가 沛 당에서 일어나자 그는 고조를 따라 장군이 되어 장두(藏茶)를 깨쳐 연왕이 되었다. 그러나 뒤에 陳 의 일로 해서 의심을 받아 흉노로 도망해서 東胡盧王에 봉해짐)이 반叛해서 흉노(북쪽 오랑캐의 하나. 몽고족 또는 토이기족의 분파라 함)로 들어가자 만은 도망해서 무리 천여명을 모아 가지고 북상투를 하고 오랑캐의 옷을 입은 채 동쪽으로 달아나 국경을 지나서 패수를 건넜다. 이리하여 진나라의 옛날 빈 터인 상하장上下 (지리지에 보면 낙랑에 雲 이란 땅이 있다)에서 살았다. 여기에서 그는 차츰 진번(漢의 4군의 하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으며, 임둔과 함께 폐지되었고, 그 일부가 낙랑에 병합됨)과 조선, 그리고 오랑캐 및 옛날 연과 제齊에서 도망한 자들을 자기에게 붙여 왕노릇하고 왕검王儉(지리지에 보면 요동에 儉瀆縣이 있었으니 이 곳은 조선왕의 옛 도읍터라고 했다. 또는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을 정했다.

   이 때는 마침 효혜고후孝惠高后 때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었을 무렵이다. 요동태수遼東太守가 만으로 외신外臣을 삼아서 국경 밖 오랑캐들을 막아서 변방에서 도둑질을 하지 못하게 하고, 또 모든 오랑캐의 군장君長들이 천자께 들어가 뵙고자 하는 자는 이를 금지하지 않도록 했다.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니 천자도 이를 허락했다. 이 때문에 만은 군사의 위엄과 재물을 얻게 되자 그 곁에 있는 조그만 고을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의 하나. 낙랑군의 동쪽, 곧 함경남도와 강원도 지방. 진번과 같이 폐지되었으며, 그 일부가 玄 에 합쳐졌다가 다시 낙랑에 귀속됨)이 모두 와서 항복하여 땅이 수천 리나 되었다.

   만은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 우거右渠(만의 손자 이름)에게 이르자 한나라에서 도망쳐 그에게로 돌아간 사람들이 몹시 많아졌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들어와서 천자를 뵙는 일이 없고, 진번의 곁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고자 해도 역시 천자를 가로막아 그들을 막아서 통하지 못하게 했다.

   원봉元封(한나라 무제의 연호. 원봉2년은 서기 109년)12년에 한나라 사신 섭하涉何가 와서 타일렀지만 우거는 종시 조서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에 섭하는 바로 국경 위로 가 패수에 임해서 자기를 따라온 부하를 시켜 마중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이란 자를 죽인 다음 곧 달려서 새방(平州 楡林關을 말함)으로 들어갔다. 돌아와서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여 자기가 조선 장수를 죽였다고 하자, 천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더 묻지 않고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지리지에 보면,요동군 무차현武次縣이 곧 동부도위가 다스리던 땅이다)를 삼았다. 이에 조선에서는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내어 섭하를 공격해 죽였다. 한편 천자는 죄인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쳤다.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박楊僕을 보내서 제나라로부터 발해渤海로 건너가는데 군사 5만명을 거느리게 했다. 또 좌장군 荀 는 요동으로 나와서 우거를 치니 우거도 군사를 내어 험한 곳에서 이를 막았다. 이 때 좌장군은 요동 군사를 많이 거느리고 먼저 갔었으나 패하여 흩어지니 군사들은 도망해 돌ㅇ간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법으로 다스려 죽였다.

  한편 누선장군은 제나라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에 이르니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 우거는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탐지하여 알고 곧 성에서 나와 누선장군의 군사를 습격하자 누선의 군사는 패해 흩어졌다. 장군 양복은 군중들을 잃고 산 속으로 들어가 숨은 지 10여일에 차츰 흩어진 군사들을 수스하여 다시 모이게 했다. 또 좌장군도 조선 패수 서쪽 군사를 쳤으나 적을 파하고 앞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이에 천자는 두 장수가 모두 싸움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위산衛山을 시켜 군사의 위엄을 보이고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했다. 우거는 사자를 보자 머리를 조아리면서 항복하기를 원했다. 그는 말하기를, "두 장수가 속여서 신을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했더니 이제 신절臣節(거짓 없는 표적)을 보니 청컨대 항복하겠나이다" 했다. 이에 우거는 태자를 보내서 들어가 사죄하고 말 5천 필과 군사 먹일 양식을 바치고 군사 만여명이 모두 병기를 가지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오려 한다. 이것을 보고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그들에게 변이 있을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할태면 군사들에게 명하여 병기는 갖지 못하게 하라"했다. 이에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속여 죽이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드디어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사자 위산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한편 좌장군은 패수 위의 군사를 파하고 앞으로 성 밑에 나가 그 서북쪽을 포위하고 누선도 역시 가서 성 남쪽을 점령하자 우거는 하는 수 없이 굳게 성을 지키니 여러 달이 되어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좌장군은 일찍이 천자를 모셨던 일이 있는데다가 연대燕代의 군사를 거느렸으니, 그러나 그는 성질이 사납고 더욱기 이긴 기세를 타서 군사들에게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 누선은 제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갔으나 이미 패해 도망한 자들이 많았다. 또 먼젓번에 우거와 싸울 적에 곤욕을 당하고 군사가 많이 죽었으므로 모두 싸움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좌장군은 마음 속으로 부끄럽게 여겨서 비록 우거를 포위는 했어도 언제나 화해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좌장군이 급히 공격하자 조선의 대신들은 비밀히 사람을 보내서 사사로이 누선에게 항복할 것을 약속하고 있었으나, 사람들이 왕래하는 중이어서 말이 아직 완전히 결정은 되지 않았다. 이때 좌장군은 자주 누선과 사울 것을 재촉했으니, 누선은 화해할 약속을 급히 이루고자 하여 사움에 응하지 않았다. 마음은 이미 누선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때문에 두 장수는 서로 사이가 좋아질 수가 없었다. 또 좌장군은 생각하기를, 누선이 전에는 싸움에 져서 군사를 잃은 죄가 있었고, 또 지금은 조선과 사사로이 좋게 지내면서도 조선은 항복하지 않고 있으니 필시 반叛할 계교가 있는 것이라 의심하고 감히 군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천자가 말하기를,"이제 장졸들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기로 위산을 시켜서 우거가 항복하도록 타이르게 했었다. 이리하여 우거가 태자를 보냈으나, 위산은 능히 일을 자기 맘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좌장군과 계획이 서로 어긋나서 마침내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두 장수는 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서로 생각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지 결정짓지 못하고 있는 터이다. 이에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서 일을 바로 잡도록 하는 것이니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라"했다.

   이리하여 공손수가 전지로 나가자 좌장군이 말하기를, "조선은 마땅히 항복한 지 오랬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항복하지 않은 것은 그 까닭이 있다. 그것은 누선이 여러 번 약속하고서도 만나주지 않은 때문이다"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좌장군은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낱낱이 말하고 나서 수遂에게, "이제 형편이 이렇게 되었는 데도 그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큰 해가 될까 두렵다. 누선만이 변을 일으킬 것만이 아니라, 또 그는 조선과 함께 군사를 합쳐 가지고 우리를 멸할 것이다" 했다. 이에 수遂도 역시 그 말을 옳게 여겨 절부節符를 가지고 누선장군을 불러서 좌장군의 영營에 들어가 일을 게획하게 했다. 이리하여 즉시 좌장군의 휘하麾下 장수에게 명하여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그 군대를 좌장군에 합친 뒤 천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천자는 수遂를 벌주었다. 장군은 이미 두 군사를 합치자 이내 급히 조선을 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는 정승 路人(索隱에 보면 路人은 漁陽縣 사람 如淳이라 했다), 정승 한도韓陶, 니계상尼谿相 삼參, 장군 협 이 서로 의논하기를, "처음에우리는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던 것인데 이제 누선은 체포되었고, 좌장군이 그의 군사들까지 합쳐서 사움이 더욱 급하니 우리는 능히 저들과 사울 수가 없다"하였다. 그러나 왕은 즐겨 항복하려 하지 않아서 한도.협.노인은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했고,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원봉3년 여름에 니게상 삼은 이에 사람을 시켜 조선 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했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고 죽은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는 여러 번 거듭 관리들을 못살게 굴었다. 이에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長과 항복한 정승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들을 잘 타이르게 하고 성기를 죽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여 네 군(이 4군이라는 것은 즉 진번.임둔.낙랑.현도이다)을 만들고 삼參을 봉하여 획청후 淸侯를 삼고 도陶를 추저후萩 侯를 삼고, 협으로 평주후平州侯를 삼고, 장長으로 기후幾侯를 삼았다. 또 최最는 그 아비가 죽었을 뿐 아니라, 자못 공이 있다고 해서 온양후溫陽侯를 삼았다. 좌장군을 불러 들이자 앉아서 공을 다투노라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여 모든 계획을 잘못한 죄를 물어 기시棄市의 형에 처했다. 또 누선장군은 군사가 열구洌口에 이르러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을 것인데도 자기 맘대로 많이 싸워서 많은 사상자를 낸 죄를 물어 마땅히 죽일 것이나 용서해서 서인庶人을 만들었다.

   태사공은 말하기를 '우거는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했고, 섭한는 공을 도둑질 했다가 적의 군사에게 머리를 잃었으며, 누선은 장졸ㅇ이 적은 것을 가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 제 허물을 벗어나려 했다. 그리하여 번우를 잃고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수와 더불어 전공을 다투다가 둘 다 함께 죽음을 당해서 두 군사가 모두 욕 되었으며, 장수로서 봉후된 사람이 없었다.'(史記)

조선 후기 - 경세유표 - 사민구직(사민평등)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의 전지(田地)는 10경(頃)이고 그 아들은 10명이라고 하자. 그 들 중 한 아들은 전지 3경을 얻고, 두 아들은 2경을 얻고, 나머지 네 아들은 전지를 얻지 못하여 울면서 길거리에서 뒹굴다가 굶어죽게 된다면 그 사람을 부모 노릇 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늘이 백성을 내릴 적에 먼저 전지를 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먹고 살게 하였고, 또 한 백성을 위하여 군주(君主)와 목민관(牧民官)을 세워 그들의 부모가 되게 하였으며, 백성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여 다 함께 잘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군주와 목민관이 팔장만 끼고 앉아 아무 일도 안 한다면, 그 아들이 서로 싸워서 재산을 빼앗고 자기에게 합치는 일을 못하게 막을 자는 누구란 말인가? 힘센 자 는 더 많이 얻게 되고 약한 자는 떠밀리어 땅에 넘어져 죽게 된다면, 그 군주와 목민관된 자는 남의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백성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여 다 함께 살 수 있도록 한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 한 사람이요, 백성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지 못하여 다같이 살 수 있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의 직무를 저버린 사람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전지를 갖게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전지를 갖지 못하게 하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곡식을 분배받게 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곡식을 분배받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공장(工匠)은 그들이 만든 기구로써 곡식을 바꾸게 되고 상인은 화물(貨物)로써 양곡을 사게 되면 아무 지장이 없게 된다.

선비는 열 손가락이 유약하여 힘든 작업을 감당하지 못하니 밭을 갈겠는가, 김을 매겠는가, 거름을 주겠는가? 그들의 이름이 노동 기록 장부에 기록되지 못하면 가을에 곡식 분배를 받지 못할 것이다. 아아, 내가 여전법(閭田法)을 시행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대체 선비란 무엇하는 사람인가? 어찌하여 선비는 손발도 놀리지 아니하고 땅에 생산된 것을 빼앗아 먹으며 남이 노동한 것을 삼켜 먹는가?

대저 선비가 놀고 먹기 때문에 땅에서 나는 이(利)가 다 개척되고 있다. 놀고서는 곡식을 분배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또한 장차 직업을 옮겨 농사를 지을 것이다. 선비 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꾼이 되면 땅에서는 이(利)도 개척되고 선비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꾼이 되면 난민(難民)도 없어질 것이다.

 선비 중에는 반드시 직업을 바꾸어서 농사꾼으로 되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경우에는 장차 어찌할 것인가? 공장(工匠)과 상인으로 변하는 자도 있을 것이며, 아침에는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옛 사람의 서적을 읽는 자도 있을 것이며, 부유한 사람의 자제를 가르치는 것으로 살 길을 구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또 한 실리(實利)를 강구(講究)하여 토지에 적합한 농작물을 분별하고 수리(水利)를 일으키며 기구를 제작하여 인력을 덜어주기도 하고 농사 기술과 목축업을 가르쳐서 농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는 그 공을 어찌 육체 노동하는 사람과 견줄 수 있겠는가? 하루의 일을 열흘로 기록하고 열흘 동안 한 일을 백일로 기록하여 그에 따라 곡식(穀食)을 분배받아야 옳을 것이다. 선비에게 어찌 분배(分配)가 없겠는가?

고려 - 동명왕편

계축년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 를 얻어 “동명왕(東明王)”의 본기(本紀)를 읽어보니 그 신이(神異)한 사적이 세상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욱 상세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신이요 요술이라 생각했으나 세 번 반복하여 탐독하고 완미(玩味)하여 보니 요술이 아니요 성(聖)이며 귀신이 아니요 신(神)이었다.……중략……동명왕의 사적은 변화의 신이한 것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요 실로 나라를 창시한 신이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훗날 무엇을 볼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노니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알게 하려 함이다.



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고율시(古律詩)
동명왕편(東明王篇) 병서(幷序)

세상에서 동명왕(東明王)의 신통하고 이상한 일을 많이 말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흔히 그 일을 말한다. 내가 일찍이 그 얘기를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선사(先師) 중니(仲尼)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았다. 동명왕의 일은 실로 황당하고 기괴하여 우리들이 얘기할 것이 못된다.”하였다.
 뒤에 《위서(魏書)》와 《통전(通典)》을 읽어 보니 역시 그 일을 실었으나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였으니, 국내의 것은 자세히 하고 외국의 것은 소략히 하려는 뜻인지도 모른다.

지난 계축년(1193, 명종 23)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보니 그 신이(神異)한 사적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鬼)나 환(幻)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세 번 반복하여 읽어서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환(幻)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하물며 국사(國史)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니 어찌 허탄한 것을 전하였으랴. 김부식(金公富軾) 공이 국사를 중찬(重撰)할 때에 자못 그 일을 생략하였으니, 공은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이 아닌가?

당현종본기(唐玄宗本紀)와 양귀비전(楊貴妃傳)에는 방사(方士)가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갔다는 일이 없는데, 오직 시인(詩人) 백낙천(白樂天)이 그 일이 인멸될 것을 두려워하여 노래를 지어 기록하였다. 저것은 실로 황당하고 음란하고 기괴하고 허탄한 일인데도 오히려 읊어서 후세에 보였거든, 더구나 동명왕의 일은 변화의 신이(神異)한 것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고 실로 나라를 창시(創始)한 신기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인들이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라는 것을 천하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한 덩어리로 뭉친 원기 갈라져서 / 元氣判渾
천황씨 지황씨가 되었다 / 天皇地皇氏
머리가 열 셋 혹은 열 하나 / 十三十一頭
그 모습 기이함이 많았다 / 體貌多奇異
그 나머지 성스러운 제왕들도 / 其餘聖帝王
경서와 사기에 실려 있다 / 亦備載經史
여절은 큰 별에 감응되어 / 女節感大星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지를 낳았고 / 乃生大昊摯
여추는 전욱을 낳았는데 / 女樞生?頊
역시 북두성(北斗星)의 광채에 감응되었다 / 亦感瑤光暐
복희씨는 희생 제도를 마련하였고 / 伏羲制牲犧
수인씨는 나무를 비벼 불을 만들어 냈다 / 燧人始鑽燧
명협(蓂莢)이 난 것은 요(堯) 임금의 상서요 / 生蓂高帝祥
서속을 내린 것은 신농씨의 상서다 / 雨粟神農瑞
푸른 하늘은 여와씨가 기웠고 / 靑天女?補
큰 물은 우(禹) 임금이 다스렸다 / 洪水大禹理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가 하늘에 오르려 할 제 / 黃帝將升天
턱에 수염 난 용이 스스로 이르렀다 / 胡髥龍自至
태고 적 순박할 때는 / 太古淳朴時
신령하고 성스러운 것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는데 / 靈聖難備記
후세에 인정이 점점 경박해져서 / 後世漸??
풍속이 지나치게 사치해졌다 / 風俗例汰侈
성인이 간혹 나기는 하였으나 / 聖人間或生
신령한 자취 보인 것이 적다 / 神迹少所示
한 나라 신작 삼년 / 漢神雀三年
첫여름 북두가 사방(巳方)을 가리킬 때 / 孟夏斗立巳
한 나라 신작 3년 4월 갑인(甲寅)
해동 해모수는 / 海東解慕漱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 / 眞是天之子

본기(本記)에 이렇게 적혀 있다.
부여왕(夫餘王) 해부루(解負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山川)에 제사하여 아들 낳기를 빌러 가는데,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자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어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니 금빛 나는 개구리 형상의 작은 아이가 있었다.

왕이,“이것은 하늘이 내게 아들을 준 것이다.”하며, 길러서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太子)로 삼았다. 정승 아란불(阿蘭弗)이, “일전에 천제(天帝)가 내게 내려와서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피하라.’하였는데, 동해(東海) 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땅이 있어 오곡(五穀)이 잘 되니 도읍할 만합니다.”하고, 아란불은 왕을 권하여 옮겨 도읍하고 동부여(東夫餘)라 이름하였다.
예전 도읍터에는 해모수(解慕漱)가 천제의 아들이 되어 와서 도읍하였다.

처음 공중에서 내려오는데 / 初從空中下
자신은 다섯 용의 수레를 타고 / 身乘五龍軌
따르는 사람 백여 인은 / 從者百餘人
고니를 타고 털깃 옷을 화려하게 입었다 / 騎鵠紛??
맑은 풍악 소리 쟁쟁하게 울리고 / 淸樂動?洋
채색 구름은 뭉게뭉게 떴다 / 彩雲浮??

한 나라 신작 3년인 임술년에 천제(天帝)가 태자를 보내어 부여왕의 옛도읍에 내려와 놀았는데 이름이 해모수(解慕漱)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오룡거(五龍車) 타고 따르는 사람 1백여 인은 모두 흰 고니를 탔다.
채색 구름은 위에 뜨고 음악 소리는 구름 속에서 울렸다.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렀다가 10여 일이 지나서 내려오는데 머리에는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찼다.

옛날부터 천명을 받은 임금이 / 自古受命君
어느 것이 하늘에서 준 것이 아닌가 / 何是非天賜
대낮 푸른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 白日下靑冥
옛적부터 보지 못한 일이다 / 從昔所未視
아침에는 인간 세상에서 살고 / 朝居人世中
저녁에는 천궁으로 돌아간다 / 暮反天宮裏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물면 곧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천왕랑(天王郞)이라 일컬었다.

내 옛사람에게 들으니 / 吾聞於古人
하늘에서 땅까지의 거리가 / 蒼穹之去地
이억 만 팔천 / 二億萬八千
칠백 팔십 리란다 / 七百八十里
사다리로도 오르기 어렵고 / 梯棧?難升
날개로 날아도 쉽게 지친다 / 羽?飛易?
아침저녁 임의로 오르내리니 / 朝夕恣升降
이 이치 어째서 그러한가 / 此理復何爾
성 북쪽에 청하가 있으니 / 城北有靑河
청하(靑河)는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다.
하백의 세 딸이 아름다웠다 / 河伯三女美

맏은 유화(柳花)요 다음은 훤화(萱花)요 끝은 위화(葦花)이다.

압록강 물결 헤치고 나와 / 擘出鴨頭波
웅심 물가에서 놀았다 / 往遊熊心?
청하에서 나와서 웅심연(熊心淵)가에서 놀았다.
쟁그랑 딸랑 패옥이 울리고 / ?琅佩玉鳴
부드럽고 가냘픈 모습 아름다웠다 / 綽約顔花媚

자태가 곱고 아리따웠는데 여러 가지 패옥이 쟁그랑거리어 한고(漢皐)와 다름 없었다.

처음에는 한고 물가인가 의심하고 / 初疑漢皐濱
다시 낙수의 모래톱을 연상하였다 / 復想洛水沚
왕이 나가서 사냥하다 보고 / 王因出獵見
눈짓을 보내며 마음 두었다 / 目送頗留意
곱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함이 아니라 / 玆非悅紛華
참으로 뒤 이을 아들 낳기에 급함이었다 / 誠急生繼嗣

왕이 좌우에게,“얻어서 왕비를 삼으면 후사를 둘 수 있다.”하였다.

세 여자가 왕이 오는 것을 보고 / 三女見君來
물에 들어가 한참 동안 서로 피하였다 / 入水尋相避
장차 궁전을 지어 / 擬將作宮殿
함께 와서 노는 것 엿보려 하여 / 潛候同來?
말채찍으로 한번 땅을 그으니 / 馬?一?地
구리집이 홀연히 세워졌다 / 銅室?然峙
비단 자리를 눈부시게 깔아 놓고 / 錦席鋪絢明
금술잔에 맛있는 술 차려 놓았다 / 金?置淳旨
과연 스스로 돌아들어와서 / ??果自入
서로 마시고 이내 곧 취하였다 / 對酌還徑醉

그 여자들이 왕을 보자 곧 물로 들어갔다. 좌우가,
“대왕은 왜 궁전을 지어서 여자들이 방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못 나가게 문을 가로막지 않으십니까?”하였다.
왕이 그렇게 여겨 말채찍으로 땅에 긋자 구리집이 갑자기 이루어졌는데 장려(壯麗)하였다. 방 안에 세 자리를 베풀고
술상을 차려 놓았다. 그 여자들이 각각 그 자리에 앉아 서로 권하며 마셔 술이 크게 취하였다.

왕이 그때 나가 가로막으니 / 王時出橫遮
놀라 달아나다 미끄러져 자빠졌다 / 驚走僅顚?

왕이 세 여자가 크게 취할 것을 기다려 급히 나가 막으니 여자들이 놀라 달아나다가 맏딸 유화(柳花)가 왕에게 붙잡혔다.

맏딸이 유화인데 / 長女曰柳花
이 여자가 왕에게 붙잡혔다 / 是爲王所止
하백이 크게 노하여 / 河伯大怒嗔
사자를 시켜 급히 달려가서 / 遣使急且?
고하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 告云渠何人
감히 경솔하고 방자한 짓을 하는가 / 乃敢放輕肆
회보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입니다 / 報云天帝子
높은 문족과 서로 혼인하기 청합니다 / 高族請相累
하늘을 가리키자 용수레가 내려오니 / 指天降龍馭
그대로 깊은 해궁에 이르렀다 / 徑到海宮邃

하백(河伯)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고하기를,“너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내 딸을 잡아 두는가?”하였다.
왕이 회보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인데 지금 하백에게 구혼하고자 합니다.”하였다.
하백이 또 사자를 보내어 고하기를,“네가 만일 천제의 아들이고 내게 구혼할 생각이 있으면 마땅히 중매를 시켜 말할 것이지
지금 문득 내 딸을 잡아 두니 어찌 그리 실례가 심한가?”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하백을 뵈려 하였으나 궁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놓아 보내고자 하니 그 여자가 이미 왕과 정이 들어서 떠나려 하지 않으며 왕에게 권하기를,
“만일 용거(龍車)가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하였다.
왕이 하늘을 가리켜 고하니, 조금 뒤에 오룡거(五龍車)가 공중에서 내려왔다.
왕이 여자와 함께 수레를 타니 풍운이 홀연히 일어나며 하백의 궁에 이르렀다.

하백이 왕에게 이르기를 / 河伯乃謂王
혼인은 큰 일이라 / 婚姻是大事
중매와 폐백의 법이 있거늘 / 媒贄有通法
어째서 방자한 짓을 하는가 / 胡奈得自恣

하백이 예를 갖추어 맞아 좌정한 뒤에 이르기를,
“혼인의 도는 천하의 공통된 법규인데 어찌하여 실례되는 일을 해서 내 가문을 욕되게 하는가?”하였다.

그대가 상제의 아들이라면 / 君是上帝胤
신통한 변화를 시험하여 보자 / 神變請可試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 속에 / 漣?碧波中
하백이 변화하여 잉어가 되니 / 河伯化作鯉
왕이 변화하여 수달이 되어 / 王尋變爲獺
몇 걸음 못 가서 곧 잡았다 / 立捕不待?
또다시 두 날개가 나서 / 又復生兩翼
꿩이 되어 훌쩍 날아가니 / 翩然化爲雉
왕이 또 신령한 매가 되어 / 王又化神鷹
쫓아가 치는 것이 어찌 그리 날쌘가 / 博擊何大?
저편이 사슴이 되어 달아나면 / 彼爲鹿而走
이편은 승냥이가 되어 쫓았다 / 我爲豺而?
하백은 신통한 재주 있음 알고 / 河伯知有神
술자리 벌이고 서로 기뻐하였다 / 置酒相燕喜
만취한 틈을 타서 가죽 수레에 싣고 / 伺醉載革輿
딸도 수레에 함께 태웠다 / 幷置女於?

수레의 옆을 기(?)라 한다.

그 뜻은 딸과 함께 / 意令與其女
천상에 오르게 하려 함이었다 / 天上同騰?
그 수레가 물 밖에 나오기 전에 / 其車未出水
술이 깨어 홀연히 놀라 일어나 / 酒醒忽驚起

하백의 술은 이레가 되어야 깬다.

여자의 황금비녀로 / 取女黃金釵
가죽 뚫고 구멍으로 나와서 / 刺革從竅出

출(出)은 협운(?韻)이다.

홀로 적소를 타고 올라서 / 獨乘赤?上
소식 없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寂寞不廻騎

하백이,“왕이 천제(天帝)의 아들이라면 무슨 신통하고 이상한 재주가 있는가?”하니, 왕이,“무엇이든지 시험하여 보소서.”하였다.
이에 하백이 뜰 앞의 물에서 잉어로 화하여 물결을 따라 노니니 왕이 수달로 화하여 잡았고,
하백이 또 사슴으로 화하여 달아나니 왕이 승냥이로 화하여 쫓았고, 하백이 꿩으로 화하니 왕이 매로 화하였다.
하백은 참으로 천제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예로 혼인을 이루고 왕이 딸을 데려갈 마음이 없을까 두려워하여 풍악을 베풀고 술을 내어
왕을 권하여 크게 취하자 딸과 함께 작은 가죽 수레에 넣어 용거(龍車)에 실으니 이는 하늘에 오르게 하려 함이었다.
그 수레가 미처 물에서 나오기 전에 왕이 술이 깨어 여자의 황금비녀로 가죽 수레를 뚫고 구멍으로 홀로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

하백이 그 딸을 책망하여 / 河伯責厥女
입술을 잡아당겨 석 자나 늘여 놓고 / 挽吻三尺?
우발수 속으로 추방하고는 / 乃貶優渤中
오직 비복 두 사람만 주었다 / 唯與婢僕二

하백이 그 딸에게 크게 노하여,“네가 내 훈계를 따르지 않아서 마침내 우리 가문을 욕되게 하였다.”하고,
좌우를 시켜 딸의 입을 옭아 잡아당기어 입술의 길이가 석 자나 되게 하고 노비 두 사람만을 주어 우발수 가운데로 추방하였다.
우발은 못 이름인데 지금 태백산(太白山) 남쪽에 있다.

어부가 물 속을 보니 / 漁師觀波中
이상한 짐승이 돌아다녔다 / 奇獸行??
이에 금와왕에게 고하여 / 乃告王金蛙
쇠그물을 깊숙이 던졌다 / 鐵網投??
돌에 앉은 여자를 끌어당겨 얻었는데 / 引得坐石女
얼굴 모양이 심히 무서웠다 / 姿貌甚堪畏
입술이 길어 말을 못하므로 / 唇長不能言
세 번 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 三截乃啓齒

어사(漁師) 강력부추(强力扶鄒)가 고하기를,“근자에 어량(魚梁 물을 막아 고기를 잡는 장치) 속의 고기를 도둑질해 가는 것이 있는데
무슨 짐승인지 알 수 없습니다.”하였다. 왕이 어사를 시켜 그물로 끌어내니 그물이 찢어졌다.
다시 쇠그물을 만들어 당겨서 돌에 앉아 있는 여자를 얻었다.
그 여자는 입술이 길어 말을 못하므로 그 입술을 세 번 잘라내게 한 뒤에야 말을 하였다.

왕이 해모수의 왕비인 것을 알고 / 王知慕漱妃
이내 별궁에 두었다 / 仍以別宮置
해를 품고 주몽을 낳았으니 / 懷日生朱蒙
이해가 계해년이었다 / 是歲歲在癸
골상이 참으로 기이하고 / 骨表諒最奇
우는 소리가 또한 심히 컸다 / 啼聲亦甚偉
처음에 되만한 알을 낳으니 / 初生卵如升
보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 觀者皆驚悸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 / 王以爲不祥
이것이 어찌 사람의 종류인가 하고 / 此豈人之類
마구간 속에 두었더니 / 置之馬牧中
여러 말들이 모두 밟지 않고 / 群馬皆不履
깊은 산 속에 버렸더니 / 棄之深山中
온갖 짐승이 모두 옹위하였다 / 百獸皆擁衛

왕이 천제 아들의 비(妃)인 것을 알고 별궁(別宮)에 두었더니 그 여자의 품안에 해가 비치자 이어 임신하여 신작(神雀) 4년 계해년
여름 4월에 주몽(朱蒙)을 낳았는데 우는 소리가 매우 크고 골상이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처음 낳을 때에 좌편 겨드랑이로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五升]들이 만하였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사람이 새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하고, 사람을 시켜 마구간에 두었더니
여러 말들이 밟지 않고, 깊은 산에 버렸더니 모든 짐승이 호위하고 구름 끼고 음침한 날에도 알 위에 항상 햇빛이 있었다.
왕이 알을 도로 가져다가 어미에게 보내어 기르게 하였더니, 알이 마침내 갈라져서 한 사내 아이를 얻었는데 낳은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언어가 모두 정확하였다.

어미가 우선 받아서 기르니 / 母姑擧而養
한 달이 되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 經月言語始
스스로 말하되 파리가 눈을 빨아서 / 自言蠅?目
누워도 편안히 잘 수 없다 하였다 / 臥不能安睡
어머니가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 母爲作弓矢
그 활이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 其弓不虛?

어머니에게,“파리들이 눈을 빨아서 잘 수가 없으니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오”하였다.
그 어머니가 댓가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스스로 물레 위의 파리를 쏘는데 화살을 쏘는 족족 맞혔다.
부여(扶餘)에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들 한다.

나이가 점점 많아지매 / 年至漸長大
재능도 날로 갖추어졌다 / 才能日漸備
부여왕의 태자가 / 扶餘王太子
그 마음에 투기가 생겼다 / 其心生妬忌
말하기를 주몽이란 자는 / 乃言朱蒙者
반드시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 此必非常士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 若不早自圖
후환이 끝없으리라 하였다 / 其患誠未已

나이가 많아지자 재능이 다 갖추어졌다. 금와왕은 아들 일곱이 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며 사냥하였다.
왕의 아들과 따르는 사람 40여 인이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는데 주몽은 사슴을 퍽 많이 쏘아 잡았다.
왕자가 시기하여 주몽을 붙잡아 나무에 묶어 매고 사슴을 빼앗았는데, 주몽이 나무를 뽑아 버리고 갔다.

태자(太子) 대소(帶素)가 왕에게, “주몽이란 자는 신통하고 용맹한 장사여서 눈초리가 비상하니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가서 말을 기르게 하니 / 王令往牧馬
그 뜻을 시험하고자 함이었다 / 欲以試厥志
스스로 생각하니 천제의 손자가 / 自思天之孫
천하게 말 기르는 것 참으로 부끄러워 / ?牧良可恥
가슴을 어루만지며 항상 혼자 탄식하기를 / ?心常竊導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 吾生不如死
마음 같아서는 장차 남쪽 땅에 가서 / 意將往南土
나라도 세우고 성시도 세우고자 하나 / 立國立城市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 爲緣慈母在
이별이 참으로 쉽지 않구나 / 離別誠未易

왕이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 그 뜻을 시험하였다. 주몽이 마음으로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나는 천제의 손자인데 남을 위하여
말을 기르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남쪽 땅에 가서 나라를 세우려 하나 어머니가 계셔서 마음대로 못합니다.”하였다.

그 어머니 이 말 듣고 / 其母聞此言
흐르는 눈물 씻으며 / ?然?淸淚
너는 내 생각 하지 말라 / 汝幸勿爲念
나도 항상 마음 아프다 / 我亦常痛?
장사가 먼 길을 가려면 / 士之涉長途
반드시 준마가 있어야 한다며 / 須必憑??
아들을 데리고 마구간에 가서 / 相將往馬閑
곧 긴 채찍으로 말을 때리니 / 卽以長鞭?
여러 말은 모두 달아나는데 / 群馬皆突走
붉은 빛이 얼룩진 한 말이 있어 / 一馬?色斐
두 길 되는 난간을 뛰어 넘으니 / 跳過二丈欄
이것이 준마인 줄 비로소 깨달았다 / 始覺是駿驥

《통전(通典)》에 주몽이 타던 말은 모두 과하마(果下馬)라 하였다.

남 모르게 바늘을 혀에 꽂으니 / 潛以針刺舌
시고 아파 먹지 못하네 / 酸痛不受飼
며칠 못되어 형상이 심히 야위어 / 不日形甚?
나쁜 말과 다름없었다 / 却與駑?似
그뒤에 왕이 돌아보고 / 爾後王巡觀
바로 이 말을 주었다 / 予馬此卽是
얻고 나서 비로소 바늘을 뽑고 / 得之始抽針
밤낮으로 도로 먹였다 / 日夜屢加?

그 어머니가,“이것은 내가 밤낮으로 고심하던 일이다. 내가 들으니 장사가 먼길을 가려면 반드시 준마가 있어야 한다.
내가 말을 고를 수 있다.”하고, 드디어 목마장으로 가서 긴 채찍으로 어지럽게 때리니 여러 말이 모두 놀라 달아나는데
한 마리 붉은 말이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넘었다. 주몽은 이 말이 준마임을 알고 가만히 바늘을 혀 밑에 꽂아 놓았다.
그 말은 혀가 아파서 물과 풀을 먹지 못하여 심히 야위었다. 왕이 목마장을 순시하며 여러 말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서
인하여 야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이 이 말을 얻고 나서 그 바늘을 뽑고 도로 먹였다 한다.

가만히 세 어진 벗을 맺으니 / 暗結三賢友
그 사람들 모두 지혜가 많았다 / 其人共多智

오이(烏伊)ㆍ마리(摩離)ㆍ협보(陜父) 등 세 사람이었다.

남쪽으로 행하여 엄체수에 이르러 / 南行至淹滯
일명 개사수(蓋斯水)인데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

건너려 하여도 배가 없었다 / 欲渡無舟艤

건너려 하나 배는 없고 쫓는 군사가 곧 이를 것을 두려워하여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개연히 탄식하기를,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황천과 후토(后土)는 나 고자(孤子)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주소서.”하고, 말을 마치고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가 나와 다리를 이루어 주몽이 건넜는데
한참 뒤에 쫓는 군사가 이르렀다.

채찍을 잡고 저 하늘을 가리키며 / 秉策指彼蒼
개연히 긴 탄식을 발한다 / 慨然發長?
천제의 손자 하백의 외손이 / 天孫河伯甥
난을 피하여 이곳에 이르렀소 / 避難至於此
불쌍한 고자의 마음을 / 哀哀孤子心
황천 후토가 차마 버리시리까 / 天地其忍棄
활을 잡아 하수를 치니 / 操弓打河水
고기와 자라가 머리와 꼬리를 나란히 하여 / 魚鼈騈首尾
높직이 다리를 이루어 / 屹然成橋梯
비로소 건널 수 있었다 / 始乃得渡矣
조금 뒤에 쫓는 군사 이르러 / 俄爾追兵至
다리에 오르니 다리가 곧 무너졌다 / 上橋橋旋?

쫓아온 군사가 하수에 이르니 고기와 자라가 이룬 다리가 곧 허물어져 이미 다리에 오른 자는 모두 빠져 죽었다.

한 쌍 비둘기 보리 물고 날아 / 雙鳩含麥飛
신모의 사자가 되어 왔다 / 來作神母使

주몽이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너는 어미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하고 오곡 종자를 싸 주어 보내었다.
주몽이 살아서 이별하는 마음이 애절하여 보리 종자를 잊어버리고 왔다.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쉬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왔다.
주몽이,“아마도 신모(神母)께서 보리 종자를 보내신 것이리라.”하고, 활을 쏘아 한 화살에 모두 떨어뜨려 목구멍을 벌려
보리 종자를 얻고 나서 물을 뿜으니 비둘기가 다시 소생하여 날아갔다.

형세 좋은 땅에 왕도를 개설하니 / 形勝開王都
산천이 울창하고 높고 컸다 / 山川鬱??
스스로 띠자리 위에 앉아서 / 自坐??上
대강 군신의 위차를 정하였다 / 略定君臣位

왕이 스스로 띠자리 위에 앉아서 대강 임금과 신하의 위차를 정하였다.

애달프다 비류왕이여 / ?哉沸流王
어째서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 何奈不自揆
선인의 후예인 것만 굳이 자긍하고 / 苦矜仙人後
천제의 손자 존귀함을 알지 못하였나 / 未識帝孫貴
한갓 부용국으로 삼으려 하여 / 徒欲爲附庸
말하는 데 삼가거나 겁내지 않네 / 出語不愼?
그림 사슴의 배꼽도 맞히지 못하고 / 未中?鹿臍
옥가락지 깨는 것에 놀랐다 / 驚我倒玉指

비류왕 송양(松讓)이 나와 사냥하다가 왕의 용모가 비상함을 보고 이끌어 함께 앉아서,“바다 한쪽에 치우쳐 있어 일찍이 군자(君子)를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대는 어떠한 사람이며 어느 곳에서 왔는가?”하니,
왕이, “과인은 천제의 손자요 서국(西國)의 왕이다. 감히 묻노니 군왕은 누구의 후손인가?”하니,
송양이,“나는 선인(仙人)의 후손인데 여러 대 왕 노릇을 하였다. 지금 지방이 대단히 작아서 나누어 두 왕이 될 수 없고
그대는 나라를 만든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부속국이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왕이, “과인은 천제의 뒤를 이었지마는 지금 왕은 신(神)의 자손도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라 칭호하니,
만일 내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하였다.
송양은 왕이 여러 번 천제의 손자라 자칭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의심을 품어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여,
“왕과 활쏘기를 원하노라.”하고, 그린 사슴을 1백 보 안에 놓고 쏘았는데 그 화살이 사슴 배꼽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힘에 겨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玉指環]를 가져다가 1백 보 밖에 달아매고 쏘았는데 기왓장 부서지듯 깨지니
송양이 크게 놀랐다.

와서 고각이 변색한 것을 보고 / 來觀鼓角變
감히 내 기물이라 말하지 못하였다 / 不敢稱我器

왕이,“국가의 기업이 새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沸流)의 사자가 왕래함에 내가 왕의 예로
맞고 보내지 못하니 그 까닭으로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하였다.
시종하는 신하 부분노(扶芬奴)가 앞에 나와,“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의 북을 가져오겠습니다.”하였다.
왕이,“다른 나라의 감추어 둔 물건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려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준 물건이니 왜 가져오지 못하겠습니까? 대왕이 부여(扶餘)에서 곤욕을 당할 때에 누가 대왕이 여기에 이르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지금 대왕이 만 번 죽음을 당할 위태한 땅에서 몸을 빼쳐 나와 요좌(遼左)에 이름을 날리니
이것은 천제가 명령하여 하는 것이라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하였다.
이에 부분노 등 세 사람이 비류에 가서 북을 가져오니 비류왕이 사자를 보내어 고하였다.
왕이 비류에서 와서 고각을 볼까 두려워하여 빛깔을 오래된 것처럼 검게 만들어 놓으니 송양(松讓)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집 기둥이 묵은 것을 와서 보고 / 來觀屋柱故
말 못하고 도리어 부끄러워했다 / ?舌還自愧

송양이 도읍을 세운 선후(先後)를 따져 부용국(附庸國)을 삼고자 하니, 왕이 궁실을 지을 때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
천 년 묵은 것같이 했다. 송양이 와서 보고 마침내 감히 도읍을 세운 선후를 따지지 못하였다.

동명왕이 서쪽으로 순수할 때 / 東明西狩時
우연히 눈빛 고라니를 얻었다 큰 사슴을 고라니라 한다. / 偶獲雪色?
해원 위에 거꾸로 달아매고 / 倒懸蟹原上
감히 스스로 저주하기를 / 敢自呪而謂
하늘이 비류에 비를 내려 / 天不雨沸流
그 도성과 변방을 표몰시키지 않으면 / 漂沒其都鄙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 / 我固不汝放
너는 내 분함을 풀어다오 / 汝可助我?
사슴의 우는 소리 심히 슬퍼 / 鹿鳴聲甚哀
위로 천제의 귀에 사무쳤다 / 上徹天之耳
장마비가 이레를 퍼부어 / 霖雨注七日
주룩주룩 회수 사수를 넘쳐나듯 / ?若傾淮泗
송양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 松讓甚憂懼
흐름을 따라 부질없이 갈대 밧줄을 가로 뻗쳤다 / 沿流?橫葦
백성들이 다투어 와서 밧줄을 잡아당겨 / 士民競來攀
서로 쳐다보며 땀을 흘리었다 / 流汗相?
동명왕이 곧 채찍을 들어 / 東明卽以鞭
물을 그으니 곧 멈추었다 / ?水水停沸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 / 松讓擧國降
이 뒤로는 우리를 헐뜯지 못하였다 / 是後莫予?

서쪽을 순행하다가 사슴 한 마리를 얻었는데 해원에 거꾸로 달아매고 저주하기를,
“하늘이 만일 비를 내려 비류왕의 도읍을 표몰시키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
이 곤란을 면하려거든 네가 하늘에 호소하라.”하였다.
그 사슴이 슬피 울어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니 장마비가 이레를 퍼부어 송양의 도읍을 표몰시켰다,
송양왕이 갈대 밧줄로 흐르는 물을 횡단하고 오리 말을 타고 백성들은 모두 그 밧줄을 잡아당겼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긋자 물이 곧 줄어들었다.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한다.

검은 구름이 골령을 덮어 / 玄雲冪?嶺
산이 뻗쳐 연한 것이 보이지 않고 / 不見山??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들려 / 有人數千許
나무 베는 소리와 방불하였다 / ?木聲??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 王曰天爲我
그 터에 성을 쌓는 것이라 한다 / 築城於其趾
홀연히 운무가 흩어지니 / 忽然雲霧散
궁궐이 우뚝 솟았다 / 宮闕高嵬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하고 오직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토목(土木) 공사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왕이,“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하였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왕이 황천께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

왕위에 있은 지 십구 년 만에 / 在位十九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았다 / 升天不下?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채찍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 한다.

뜻이 크고 기이한 절개 있으니 / ??有奇節
원자의 이름은 유리이다 / 元子曰類利
칼을 얻어 부왕의 위를 이었고 / 得劍繼父位
동이 구멍 막아 남의 꾸지람을 그쳤다 / 塞盆止人?

유리가 어려서부터 기이한 기절이 있었다 한다. 소년 때에 참새 쏘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보고
쏘아서 뚫었다. 그 여자가 노하여 욕하기를,“아비도 없는 자식이 내 물동이를 쏘아 뚫었다.”하였다.
유리가 크게 부끄러워하여 진흙 탄환으로 쏘아서 동이 구멍을 막아 전과 같이 만들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유리가 나이 어리기 때문에 희롱 삼아 말하기를,“너는 일정한 아버지가 없다.”
하였다. 유리가 울며,“사람이 일정한 아버지가 없으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남을 보겠습니까?”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찌르려
하였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리며,“아까 한 말은 희롱 삼아 한 말이다. 너의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인데
부여의 신하되는 것을 원망하다가 도망하여 남쪽 땅에 가서 국가를 창건하였단다. 네가 가보겠느냐?“하였다.
대답하기를, “아버지는 임금이 되었는데 아들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내가 비록 재주 없으나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어머니가,“너의 아버지가 갈 때 말을 남기기를 ‘내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 소나무에 물건을 감추어 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찾아 얻는 자는 내 자식이다.’ 하였다.”했다. 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찾다가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다.
유리가 당(堂)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는데 그 기둥은 돌 위의 소나무이고 나무 모양이 일곱 모서리였다.
유리가 스스로 해득하기를,“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라는 것은 일곱 모서리이고, 돌 위 소나무라는 것은 기둥이다.”하고
일어나 가 보니 기둥 위에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에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얻고 크게 기뻐하였다.
전한(前漢) 홍가(鴻嘉) 4년 여름 4월에 고구려(高句麗)로 달아나서 칼 한 조각을 왕께 받들어 올렸다.
왕이 가지고 있는 부러진 칼 한 조각을 내어 합하니 피가 나면서 이어져 한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네가 실로 내 자식이라면 무슨 신성(神聖)함이 있느냐?”하니, 유리가 즉시 몸을 날리어 공중에 솟구쳐 창구멍으로
새어 드는 햇빛을 막아 기이한 신성을 보이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내 성품 본래 질박하여 / 我性本質木
기이하고 괴상한 것 좋아하지 않는다 / 性不喜奇詭
처음에 동명왕의 일을 보고 / 初看東明事
요술인가 귀신인가 의심하였다 / 疑幻又疑鬼
서서히 서로 간섭하여 보니 / 徐徐漸相涉
변화가 추측하여 의논하기 어렵다 / 變化難擬議
하물며 이것은 직필로 쓴 글이라 / 況是直筆文
한 글자도 헛된 글자가 없다 / 一字無虛字
신이하고도 신이하여 / 神哉又神哉
만세에 아름다운 일이다 / 萬世之所?
생각건대 창업하는 임금이 / 因思草創君
성신이 아니면 어찌 이루랴 / 非聖卽何以
유온이 큰 못에서 쉬다가 / 劉?息大澤
꿈꾸는 사이에 신을 만났다 / 遇神於夢寐
우뢰 번개에 천지가 캄캄하고 / 雷電塞晦暝
괴이하고 위대한 교룡이 서려 있었다 / 蛟龍盤怪傀
인하여 곧 임신이 되어 / 因之卽有娠
성신한 유계를 낳았다 / 乃生聖劉季
이것이 적제의 아들인데 / 是惟赤帝子
일어남에 특이한 복조가 많았다 / 其興多殊祚
세조 광무황제가 처음 태어날 때 / 世祖始生時
광명한 빛이 집 안에 가득하였다 / 滿室光炳?
절로 적복부에 응하여 / 自應赤伏符
황건적을 소탕하였다 / 掃除黃巾僞
자고로 제왕이 일어남에 / 自古帝王興
많은 징조와 상서가 있으나 / 徵瑞紛蔚蔚
끝 자손은 게으르고 거칠음이 많아 / 末嗣多怠荒
모두 선왕의 제사를 끊어뜨렸다 / 共絶先王祀
이제야 알겠다 수성하는 임금은 / 乃知守成君
신고한 땅에서 작게 삼갈 것을 경계하여 / 集蓼戒小毖
너그럽고 어짊으로 왕위를 지키고 / 守位以寬仁
예와 의로 백성을 교화하여 / 化民由禮義
길이길이 자손에게 전하여 / 永永傳子孫
오래도록 나라를 통치하였다 / 御國多年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