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일 수요일

고려 - 최승로 오조정적평 시무23조


성종 원년(982)에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이 되었다. 그 때 왕이 신하의 진언을 요구하자 최승로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신은 시골에서 생장해 성품이 우매하고 학문이나 기예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태평한 세상을 만나 오래 동안 근시()의 직임을 외람되게 맡았고 여러 차례 특별한 영예를 입었습니다. 지금의 폐습을 바로잡을 뛰어난 정책은 부족하지만 마음에 간직한 일편단심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살펴보건대, 당나라 현종() 개원()6) 연간에 사신()으로 있던 오긍()은 『정관정요()』7)를 지어 현종에게 태종()의 선정을 본받도록 권고하려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시대의 상황이 서로 비슷하고 한 왕실인데다 정치가 훌륭하여[8)] 모범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살펴보니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고 왕통을 물려주신 것[9)]은 곧 개조()의 공이요, 여러 임금들이 왕위를 물려받아 위업을 계승한 것은 뒤 임금들의 덕입니다. 개조께서 나라를 세워 자손의 행복과 경사를 열어주신 반면, 뒤 임금들은 중흥과 침체를 거듭했으나 일면 부족함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정치에 치란이 있고 일에 선악이 있으며, 시작할 때와 같이 마무리를 잘하지 못해 위태롭고 어지러운 지경에 이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니,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개국한 이래로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두 저의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5대 조정에서 정치와 교화가 잘되었거나 잘못된 사적을 기록하여 본받을 만하고 경계할 만한 것을 조목별로 아뢰겠습니다.

삼가 살펴보니 우리 태조신성대왕()께서 왕위에 오르신 그 시기는 난세[10)]에 해당하였고 운수는 천년에 합치[11)]하였습니다. 처음에 내란을 평정하고 흉악한 무리를 정벌할 때, 하늘이 임시로 그 일을 맡을 군주를 내어 그의 손을 빌리었고, 그 뒤에 도참비기()의 예언에 따라 천명을 받고서 왕의 자리에 오르니 사람들이 태조의 덕망을 알고서 따르고 복종하였습니다. 곧 신라[12)]가 스스로 멸망하였고 고려[鹿]13)가 다시 일어나는 운을 타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곧 대궐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요하()와 패수(浿)14)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15)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16)를 통일하였으니, 공적은 더없이 높고 덕망은 한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란()은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하고17) 있으니 먼저 우호를 맺어야 하며, 저들 또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국교를 거절했던 것은 저들이 발해와 서로 연합했다가 갑자기 의심하면서 옛 동맹을 돌아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조는 이같이 무도한 나라와 국교를 맺을 수 없다고 여겨 그들이 바친 낙타를 모두 버리고 기르지 않았습니다. 그 심원한 계책으로 우환을 미연에 막고 위태롭기 전에 나라를 보존함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발해는 거란의 군사에게 격파되고 그 나라의 세자인 대광현()18) 등이 우리나라가 의리로 흥기하였으므로 남은 무리 수만 호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달려왔습니다. 태조는 이들을 더욱 가엾게 여기고, 영접하여 대우함이 매우 두터웠고, 성씨와 이름을 내려주기까지 하였으며, 그들을 종실의 적()에 붙이어서 자기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문무 참좌() 이하에게도 모두 벼슬과 품계를 넉넉하게 내려 주었습니다. 이렇듯 열심히 멸망한 나라를 보존해 주고 끊어진 제사를 이어가게 해 줌으로써,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복속하게 만든 것입니다.

후백제()19)의 견훤은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며 변란을 좋아하여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못살게 했습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쉴 겨를도 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죄를 다스리어 마침내 망해가는 신라를 바로잡았으니,20) 그가 옛 임금을 잊지 않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안정시킨 것이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신라 말기부터 우리나라 건국 초기까지 서북의 변방 백성들은 늘 여진() 오랑캐21)의 기병이 침구해 노략질하는 통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태조는 마음속으로 용단을 내리고 한 사람의 뛰어난 장수22)를 보내어 그 곳을 지키게 하니,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도 도리어 미개인들이 귀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국경 밖이 조용해지고 변방에 근심이 없었으니 태조께서 사람을 알아보고 임무를 적절히 맡기며,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고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을 능숙하게 다룸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운수가 다하여 스스로 귀화하기를 간청23)했으나, 태조는 두 세 번 사양하다가 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동쪽으로는 명주( :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로부터 흥례부( : 지금의 울산광역시)에 이르기까지 1백 십여 성들이 다들 태조의 인후함을 흠모해 때 맞춰 와서 복종했습니다. 태조께서 예로써 사양하여 사람들이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이 또한 이러했던 것입니다.

다만 남쪽으로 후백제를 평정하면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했습니다. 군사를 동원함이 전후 수차례였으나 태조의 깃발과 군마 앞에서 어떤 자는 전쟁터에 나서자마자 바로 투항했고 어떤 자는 풍채를 우러러 보다 두려워서 투항했습니다. 비록 창과 칼을 마주하고 싸워도 살상하지 않으려 했으니, 이는 어진 사람에게 적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견훤은 죄악을 쌓은 지 수십 년 만에 반역한 자식에게 갇혔다가 우리나라로 도망해 와서 반역한 자식24)들을 무력을 빌려 토벌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후한 예로 맞아들였고, 그가 죽자 부의를 넉넉하게 내려주었습니다. 내세와 현세에 두루 걸친 도덕과 삶과 죽음에 두루 통한 의리가 이와 같았습니다.

후백제를 평정하고 태조가 도성에 들어가서 궁핍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어 구휼하였고, 위로와 회유를 두텁게 더하였으며 여러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백성의 재물을 털끝만큼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 남북이 오래 동안 분열되고 신구()25)가 구별되었으나 태조가 이를 한결같이 어루만지어 시종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태조의 도량이 크고 너그럽고 관대함26)이 또한 이러했습니다.

통일을 이룩한 이래로 여덟 해 동안 정사에 부지런하였고, 예로써 큰 나라를 섬기고 도의로써 이웃 나라와 사귀었으며, 편안할 때 안일하지 않았고 아래 사람을 접할 때 공경했습니다. 도덕을 소중하게 여기고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했습니다. 궁실()을 낮게 지어 겨우 비바람을 가리고자 했으며, 거친 옷을 입어 단지 추위와 더위만을 막았습니다. 어진 이를 좋아했고 착한 일을 즐겼으며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 바르고 겸한 마음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민간에서 생장하여 어렵고 힘든 일을 두루 겪었으므로 사람들의 진실과 거짓을 모두 깨닫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온갖 일들의 안녕과 위기를 앞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과 벌이 적절하게 시행되었고, 진실과 거짓이 명확히 구분되었으니,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방법을 알고, 제왕이 행해야 할 것을 체득함이 또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 그들의 재주를 잃게 하지 않았으니, 아랫사람을 거느릴 때는 반드시 그의 능력을 알아보았고, 어진 이를 임용할 때는 믿는 마음을 변치 않았으며, 사악한 사람을 제거할 때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불교를 높이 받들고 유교를 소중하게 여겨 임금으로서의 미덕이 이로써 갖추어지게 되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좋은 계책이 본받을 만했습니다. 다만 창업의 초기로 태평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아 종묘사직이 아직 굳게 안정되지 못했고, 예악 문물에 부족한 것이 많으며, 백관의 품계와 격식, 그리고 내외의 규정과 의례가 미처 갖춰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조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27) 이는 나라 사람의 불행이며, 믿기 어려운 천도()로 참으로 애석하다 할 것입니다.

혜종은 오랫동안 태자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감국()과 무군()28)의 직무를 처리하였으며, 스승을 존경하여 예우하고 빈객()과 관료들을 잘 접견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명성이 조야에 알려져 처음 즉위했을 때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정종의 형제가 반역의 뜻을 가졌다고 참소29)하였습니다. 그러나 혜종은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으며 또한 물어보지도 않은 채, 은혜로 대우함이 더욱 더하여 그를 처음과 같이 대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 분의 큰 도량에 감복하였습니다.

얼마 뒤 덕정()을 닦지 않고 지나치게 자신의 목숨을 아껴, 곁에 항상 무장한 군사를 뒤따르게 하니, 이는 대개 사람을 의심함이 너무 심하여 군주의 체통을 크게 잃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상()이 장사들에게 치우쳐 혜택이 고르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의 안팎에서 사람들의 원망과 탄식이 크게 일어 인심을 잃었습니다. 또한 즉위한 다음 해(944)에 곧 불치의 병을 얻어 오랜 세월을 병석에서 지내셨습니다. 이 때 조정의 신하로 어진 사람은 그 앞에 가까이 가지 못했고 향리()의 소인()30)들이 항상 침실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병이 더욱 위독해질수록 노여움이 날로 더해서 3년 동안 백성들은 그의 덕을 입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혜종이 돌아가시는 날31)에야 겨우 횡액을 면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정종은 태자로 계실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혜종이 병석에 누워 오래 동안 회복되지 않자 재신() 왕규() 등이 몰래 모의하여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이 이를 먼저 알아차리고 은밀히 서도(西)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군32)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대비했습니다. 내란이 일어나려 하자 호위하는 군사가 많이 도착했으므로 간악한 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흉악한 무리들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는 비록 천명에 따랐다고는 하나 사람의 계책도 있었으니 어찌 뛰어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정종으로부터 지금까지 38년 간 왕위33)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

정종은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했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였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참()을 그릇되게 믿게 되자 도읍을 옮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굳세어 고집을 굽히지 아니했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도읍34)을 옮기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광종은 뛰어난 용모와 특출하게 영리한 자질로 태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종의 유언을 받고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아[35)] 보위를 이었습니다[36)]. 아래 사람을 접하는데 예가 있었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데 관찰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종친과 귀족이라고 사정을 두지 않았고, 항상 세력이 강한 자들을 눌렀습니다. 소원하고 천한 사람이라고 버리지 않았고, 홀아비 및 과부 등 불쌍한 이들에게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그가 즉위한 해로부터 8년간 정치와 교화가 맑고 공평하였으며 형벌과 상이 지나치지 않았습니다.37)

쌍기()를 등용한 뒤로부터 문사()38)들을 존중하여 대접이 지나치게 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재능이 없는 사람[]39)이 부당하게 등용되고, 순서를 지키지 않고 별안간 승진하여 채 일 년이 되지 않아서 재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저녁마다 사람을 불러 접견하고, 어떤 때는 날마다 접견하여 의견을 들었습니다[40)]. 이런 일을 기쁘게 생각하고 정사를 게을리하여 나라의 중요한 일은 막혀서 통하지 않고 마시고 먹는 잔치는 이어져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남북용인()41)이 다투어 의탁하길 청하는데 지혜와 재능을 논하지 않고 모두 특별한 은혜와 예절로써 대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젊은 신진들[42)]은 앞을 다투어 나아가고 오래된 신하43)들은 점점 쇠락했습니다.

비록 중화의 교화는 소중하게 여겼지만 중화의 법식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중화의 선비는 예의로 대우했지만 중화의 현명한 인재는 쓰지 못했습니다. 백성에게서는 피와 땀이 서린 재물을 짜내고, 사방으로부터는 실속 없는 칭찬만을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시는 정치에 힘쓰지 않고 빈료()만을 접견하니, 시기만 날마다 깊어 가고 군신 간에 정사에 대한 의논의 길44)은 날로 막혀서 정치적 득실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불사()45)에 너무 의지하고 법문을 지나치게 소중히 여겨 정기적으로 행하는 재()가 이미 많이 베풀어졌는데도, 특별히 발원하는 분향()과 수법()이 적지 않았습니다. 오직 복과 장수를 구하는데 전심하고 기도만을 일삼아 한정된 재력을 탕진하면서 무한한 인연을 만들려 하였습니다. 이는 제왕()의 지위를 스스로 낮추고 사소한 선행만을 즐긴 것입니다. 또한 연회와 놀이에 드나들면서 사치가 끝이 없었습니다. 당장 눈앞에 사고가 없는 것을 불교의 힘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고 생각하여 잘못된 행위를 뉘우쳐 고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대궐은 반드시 규정된 국가의 법제를 초월하여 지었고, 의복과 음식은 모름지기 곱고 얇은 비단을 사용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 사치스럽게 하였습니다. 토목 사업46)은 농번기를 피하지 않았고, 기이한 물건의 제작은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평상시 일 년의 경비를 대략 계산하면 태조가 십년 동안 쓴 비용이 될 만 했습니다.

또 말년에는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만약 광종이 항상 삼가하고 검소한 뜻을 마음에 새겨 비용을 절감하며 처음과 같이 정사에 부지런히 힘썼더라면, 어찌 그의 복록과 수명이 길지 못하여47) 명이 겨우 쉰에 그쳤겠습니까? 그가 마무리를 잘하지 못했던 일은 참으로 애석합니다. 더구나 경신년부터 을해()년(광종 26, 975)까지 16년간 간악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앞을 다투어 진출하면서 참소하여 헐뜯음이 크게 일어나 군자는 몸을 둘 곳이 없었고 소인만 뜻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자식이 부모를 거스르고 종이 그의 주인을 비난 공격하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마음을 달리하고 임금과 신하의 몸이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래된 신하와 경험 많은 장수[宿48)]들은 차례로 죽임을 당했고 가까운 친인척들은 모두 죽어갔습니다.

더욱이 혜종이 형제를 온전히 할 수 있던 것과 정종이 나라를 잘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 은혜와 의리가 두텁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 두 임금의 조정에는 오직 외아들만이 있었는데, 광종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지 않았으니, 그들의 덕을 갚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곧 다시 그들의 원한을 깊게 맺게 한 것입니다. 또 말년에는 자기의 외아들에 대해서까지 의혹과 시기를 품었습니다. 그래서 경종이 태자로 있으면서 늘 편안하게 있지 못하다가 요행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아아! 어찌하여 처음에 착해서 명망을 얻었다가 뒤에는 착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깊이 통탄할 일입니다.

경종은 깊은 궁궐 속에서 태어나 부녀자의 손49)에서 자라난 관계로 궁궐 문 밖의 일은 일찍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단지 천성이 총명하여 광종의 말년에도 화를 면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즉위하신 뒤에 참소하고 중상한 해묵은 문서들을 불사르고 여러 해 옥에 갇혔던 죄수들을 석방하니 원한과 울분이 모두 없어지고 조정과 민간에서 경사라 일컬었습니다. 다만 정치하는 법도를 알지 못해 권호()50)에게 오로지 정권을 맡겼기 때문에 피해가 종친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재앙의 징조51)가 먼저 나타나 뒤에 비록 깨닫고 뉘우쳤으나 책임이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간사한 것과 정직한 것이 분별되지 않고 상을 내리는 것과 죄를 주는 것이 한결같지 않아 올바른 정치를 하는 데 이르지 못했습니다. 다시 정사를 게을리 하였으며 드디어 여색에 빠져 향악() 연주를 즐겨 관람하다가 뒤에는 장기와 바둑을 종일 두어도 싫증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곁에는 오직 중관()52)·내수()53)들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군자의 말은 들어갈 곳이 없고 소인의 말만 때때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도 일찍이 좋은 명성이 있었으나 말년에는 어진 덕행이 없었으니 이른바 ‘시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끝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54)는 것입니다. 충신의사로서 누군들 이를 원통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친히 보고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경종에게도 칭송할만한 미덕이 있었습니다. 처음 병이 나서 아직 위독하지 않았을 때 침실에서 전하를 접견하시고 손을 잡고 말씀하시면서 나라를 부탁했습니다. 이는 사직의 복일뿐만 아니라 인민의 행복이었습니다. 생각건대 혜종·경종 두 분은 모두 태자로서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사람들이 다른 뜻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형제 사이에 왕위를 계승할 경우에 분명한 부탁이 없으면 반드시 다툼의 단서가 일어났습니다. 혜종은 2년 동안 병으로 누워 있다가 돌아가셨는데 흥화낭군()55)이란 아들을 두고 있었으나 나이 어리고 여러 아우들에게 뒷일을 충분히 부탁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종이 스스로 여러 신하들로부터 추대를 받아 왕위를 이었습니다. 정종은 임종하면서도 일찍이 광종에게 왕위를 전하여 주어 왕실과 사직을 안정시켰습니다. 때문에 정종과 경종 두 임금의 남긴 분부는 현명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살피건대 혜종·정종·광종 세 임금이 서로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는 모든 일이 안정되지 못한 시기여서 개경·서경의 문무 관리들의 절반 이상이 이미 살상되었습니다. 더구나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소가 일어나서 형벌에 연루된 이들은 대부분 죄가 없었고, 역대로 공훈을 세운 신하와 경험 많은 노장들이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경종이 왕위에 오를 때 옛 신하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은 40여 명뿐이었습니다. 그 때에도 피해를 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모두 후진과 남을 참소한 무리들[56)]이므로 진실로 애석하지 않습니다.

단지 천안낭군()과 진주낭군()은 본래 황실의 자손이어서 광종도 오히려 몸소 관용을 베풀고 마침내 이들을 법으로 처리하지 않았으므로 경종의 재위 기간에 이르러 충분히 왕실의 울타리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권세를 잡은 신하의 피해를 입고 죽어서 지하의 원통한 넋이 되었으니, 어찌 종실[]57)의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돌아가신 선왕께서 장수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불행에서 기인함이 많으니 이런 일은 후세에 경계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상성()의 덕을 가지시고 중흥의 시기를 만났으며, 선대의 왕이 왕위를 겸손하게 물려 준 은혜에 기인하여 역대 왕들의 크나 큰 왕업58)을 계승하시니 하나의 생물도 그의 삶을 즐기지 않은 것이 없었고 한 사람도 그의 거처를 얻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안팎이 함께 기뻐하고 사람과 신이 서로 경하하니, 소위 하늘이 내려 주고 사람들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태조의 유풍을 잘 준수하신다면, 당나라 현종이 문황( : 당나라 태종)을 추모한 옛 일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또 네 조정의 근대 사적에서 본받을 만한 것은 본받고 버릴 것은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곧 혜종께서는 골육을 보전한 공적이 있으니 형제간에 우애의 의리를 가졌다고 할 수 있고, 정종께서는 반란의 싹을 미리 알아서 내란59)을 잘 진정시켜 다시금 왕실과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 왕위를 전수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였으니 지모가 밝았다고 할 수 있으며, 광종의 초기 여덟 해 동안 정치는 3대에 견줄 수 있고 조정의 의례와 제도도 자못 볼 만한 것이 있으니 소위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이 고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종께서는 돌아가신 국왕의 재위 기간에 원통하게 옥살이한 죄수 수천 명을 석방하고 여러 해 동안 참소하여 헐뜯은 문서를 불태우니 소위 너그러운 마음과 인자한 품성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네 조정이 정치한 사적이 대략 이와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잘한 사적을 받아들여 이를 행하고 잘하지 못한 사적을 보고 경계하며, 긴급하지 않은 일을 없애 버리고 이롭지 않은 노역을 폐지하시어 오직 임금은 위에서 평안하시고 백성은 아래에서 기뻐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처음을 잘하는 마음으로써 마침을 잘하는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날마다 삼가 비록 쉴 수 있는 날에도 쉬지 말며, 비록 군주가 되었더라도 스스로 존대하지 말며, 재능과 미덕을 풍부히 가졌더라도 스스로 교만하거나 뽐내지 말고 오직 자기를 공손히 하는 마음을 돈독히 하며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을 끊지 않으시면 복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올 것이고, 재앙은 기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멸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하의 수명이 어찌 만년이나 되지 않겠으며, 왕업이 어찌 백세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저는 비록 어리석으나 외람되이 국가의 요직에 있으면서 이미 아뢸 것이 마음에 있고 또 회피할 길이 없으므로 삼가 하잘 것 없는 소견을 기록하니, 시무책 28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를 모두 별지로 첨부하여 올립니다.

() 우리나라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래 마흔 일곱 해가 지났으나 병사들이 아직 편안한 잠을 자지 못하고, 군량의 소모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서북쪽이 오랑캐[]60)와 이웃하여 경비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러한 일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대체로 마헐탄()61)을 경계로 삼자는 것은 태조의 뜻이며, 압록강가의 석성()을 경계로 삼자는 것은 대조()62)가 결정한 것입니다. 장차 이 두 곳 중에 전하께서 마음속으로 판단하여 요충지를 가려서 강역을 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토착인 가운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 곳의 경비에 종사케 하고, 그 가운데 두 세 명의 편장을 뽑아서 이들을 도맡아 다스리게 하면 경군()들은 교대로 경비하는 고생을 면할 수 있으며, 말먹이와 군량을 급히 운반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덜 것입니다.

() 제가 듣건대, 성상께서는 공덕재()63)를 베풀기 위하여 때로는 친히 맷돌에 차를 갈기도 하고 때로는 보리를 찧으신다고 하시니, 저는 전하께서 친히 근로하시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폐단은 광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는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현혹되어 자신의 죄업을 없애고자 하여, 백성이 피와 땀을 흘려 얻은 재물을 빼앗아 불사()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때로는 비로자나참회법()64)을 베풀기도 하고, 또 구정()65)에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귀법사()66)에서 무차회()·수륙회()67)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에게 재를 올리는 날68)에는 반드시 걸식하는 승려69)들에게 음식을 공양하였고, 때로는 내도량()70)의 떡과 과일을 걸인들에게 내주었습니다. 또 신지()와 혈구(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및 마리산(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등지의 물고기 잡는 곳을 방생하는 장소로 삼아 한 해에 네 번 사자를 보내어 그 지방의 사원에 나아가 불경()을 강설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살생을 금지하여 주방의 고기반찬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게 짐승을 죽이지 말고 시장에서 사서 바치게 하였습니다. 대소의 신민()에게 모두 참회하도록 하여 쌀·잡곡·땔나무·숯·건초·콩을 어깨에 메거나 등에 지고서 서울과 지방의 길가는 사람에 베풀게 한 것이 이루어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벌써 남을 헐뜯는 말을 믿어 사람을 초개와 같이 여겨 베어 죽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항상 백성이 피와 땀을 흘려 얻은 재물을 다 짜내어 재를 올리는 재원으로 공양하였습니다.71) 이때에 자식이 부모에게 등을 돌리고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며, 여러 범죄자들 중에 모습만 바꾸어 승려가 된 자 및 떠돌아다니면서 빌어먹는 무리들이 진짜 승려들과 함께 섞여 재 올리는 곳으로 오는 자가 많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72)

지금 전하께서 왕위에 있으면서 실행하신 일들이 저와는 같지 않으나, 다만 이런 몇 가지 일들은 전하의 몸을 괴롭게 할 뿐이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군왕의 체통을 바르게 하여 이득이 없는 일을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 우리 조정의 임금을 호위하는 군졸들은 태조시대에는 궁성을 숙위(宿)하는 일만 맡았을 뿐이어서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광종은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장수와 재상들에게 체벌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스스로 의심을 품고 군사의 수를 더욱 늘렸습니다. 주군()에서 풍채 좋은 사람73)을 뽑아 대궐 안에 들여 시위하게 했고, 모두 궁궐의 주방에서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의논은 번잡하고 이로울 것이 없다고들 했습니다. 경종 때에 와서 비록 줄였다고는 하나 지금도 여전히 그 수가 많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태조의 법을 준수하시어 날래고 용감한 사람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그만두게 하여 돌려보내면 사람들 사이에는 원망이 없을 것이고, 나라에는 재물이 비축될 것입니다.

() 전하께서는 장·술·메주·국을 길가는 사람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제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광종을 본받아 죄업을 없애고 널리 베풀어 인연을 맺는 뜻을 본받고자 하시지만 이것은 이른바 작은 혜택으로는 널리 미치지 못한다[74)]는 것입니다. 만약 상벌을 명확히 하여 악한 것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한다면 복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일은 임금이 정치하는 요체가 아니니 이를 철회하길 바랍니다.

() 우리 태조께서는 큰 나라를 섬기는 일에 마음을 두셨으나, 몇 해에 한 번씩 사신을 보내어 교빙의 의례를 시행할 따름이었습니다. 지금은 사신을 보낼 뿐만 아니라 무역 때문에 오가는 사신이 번다하니 중국에서 천하게 여길까 염려됩니다. 또 왕래하다가 배가 침몰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교빙하는 사신에게 무역을75)겸행하게 하고, 기타 때 아닌 매매는 모두 금지하여 못하게 하십시오.

() 모든 불보()76)의 돈과 곡식은 여러 사원의 승려들이 각기 주·군에 사람을 보내어 그것을 관리하게 하고 해마다 이자를 받아 백성을 괴롭히고 소란스럽게 합니다. 청컨대 이를 모두 금지하고 그 돈과 곡식을 사원의 전장()으로 옮겨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주전()77) 중에 전정()을 가진 자는 그것을 거두어 들여 사원의 장()과 소()78)에 소속시킨다면 백성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 줄어들 것입니다.

() 임금이 백성을 다스릴 때 집집마다 가서 날마다 그들을 살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어 가서 백성의 이해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조인 태조께서도 통일한 뒤에 외관()79)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개 초창기이기 때문에 일이 번잡하여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제가 살펴보건대, 시골 토호들이 늘 공무80)를 빙자하여 백성들을 침해하여 포악하게 굴므로 백성들이 명령을 견뎌내지 못하니, 청컨대 외관을 두기를 바랍니다. 비록 일시에 모두 다 보낼 수 없을지라도 우선 10여개 주·현()을 합하여 한 명의 외관을 배치하고 그 아래 각기 두 세명의 관원을 두어서 백성을 어루만지며 보살피는 일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 제가 살피건대, 성상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굴산()81)의 승려인 여철()82)을 맞이하여 대궐로 불러 들였습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여철이 과연 사람들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사는 곳의 물과 흙도 전하의 소유이고 아침저녁으로 먹는 음식도 전하께서 내려주신 것이오니,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늘 축원을 일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번거롭게 대궐로 맞아들인 뒤에야 복을 베풀어 주겠습니까?

이전에 선회()83)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요역을 피하려고 출가하여 산에 살았습니다. 광종께서는 그를 극진하게 공경하고 예의를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선회가 길가에서 갑자기 죽어서 그의 시신이 길에 뒹굴었습니다. 그 같은 평범한 승려는 자기 자신도 화를 당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겨를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여철을 산으로 돌려보내시어 선회와 같은 비난을 받지 않게 하십시오.

() 신라 때 공경·백료·서인의 의복·신발·버선에는 각기 품등의 색깔이 있었습니다. 공경·백료는 조회 때 나갈 때는 공란()84)을 입고 천집(穿)85)을 갖추었으나, 조회에서 물러나올 때면 편리하게 옷을 입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무늬 있는 옷을 입을 수 없게 했던 것은 귀천을 나누고 존비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공란은 비록 우리나라에서 난 것이 아니라도 백관들이 스스로 구해 썼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태조 이래로 귀천을 논하지 않고 임의로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관직이 높아도 집이 가난하면 공란을 갖출 수 없고, 관직이 없어도 집이 부유하면 화려한 비단 의복을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물건은 좋은 것이 적고 조잡한 것이 많습니다. 무늬가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난 것이 아닌데도 사람마다 입을 수 있으니, 다른 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 백관의 예복이 법식대로 되지 않아서 수치를 당할까 염려스럽습니다.

바라옵건대 관료들에게 조회에서는 한결같이 중국과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공란과 천집을 갖추도록 하고, 일을 보고할 때는 버선신·명주신·가죽신을 신도록 하며, 서인들은 화려한 문양이 있는 깁과 주름이 잡힌 고운 비단을 입을 수 없게 하고 다만 굵은 명주만 입을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 제가 듣건대 승인()들이 군현을 오고 가면서 관·역에 유숙하고 향리와 백성들을 매질하여 그들의 영접과 물건 공급이 더디다고 꾸짖는데도, 향리와 백성들은 그들이 정말 왕명에 따라 출장을 나왔는지 의문이 들어도 두려운 나머지 감히 말하지 못하니, 폐단이 더할 수 없이 큽니다. 지금부터 승도()들이 관·역에 유숙하는 것을 금지시켜 그 폐단을 제거하소서.

() 중국의 제도는 준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습속은 각기 그 지역의 특성을 따르는 것이므로 모두 바꾸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악()·시서()의 가르침과 군신·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모범으로 삼아서 비루한 습속을 고치도록 하고, 그 나머지 거마와 의복 제도는 토착적인 풍속을 따를 수 있게 하여 사치와 검약을 적절히 할 것이고, 굳이 중국과 같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 여러 섬에 사는 사람들은 그 조상의 죄 때문에 바다 가운데서 생장하고 있으나, 토지에서는 먹을 것이 나지 않아 생활이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광록시(祿)86)에서 시도 때도 없이 물품을 거두어들이므로 날로 곤궁하게 되었습니다. 주·군의 사례에 따라 그들의 공역을 공평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봄에 연등회()87)를 거행하고 겨울에 팔관회()88)를 개최하느라 사람들을 징발해 각종 노역이 대단히 번거로우니, 원컨대 이를 대폭 줄여 백성의 수고를 덜어 주십시오. 또 갖가지 우인()을 만드느라 그 비용이 매우 많이 드는데도 한번 의례에 사용한 뒤 부수어 버리니 이는 쓸모없는 일입니다. 또한 우인은 상례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서조(西)의 사신이 와서 이것을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간 일도 있으니, 바라건대 지금부터는 이것을 사용하지 말게 하십시오.

() 『주역』에,89) ‘성인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천하가 화평해진다.’고 하였고, 『논어』에,90) ‘하는 일이 없이 다스리는 사람은 아마도 순임금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했는가? 자신을 바르게 하여 조정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고 했습니다. 성인이 하늘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순수하고 한결같은 덕과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마음을 겸손하게 가지며 늘 삼가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지녀 신하를 예의로 대우하시면, 누가 마음과 힘을 다해 나와서는 좋은 계책을 아뢰고 물러가서는 국정을 바로잡아 도울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왕이 신하를 예의로써 부리면 신하는 왕을 충성으로써 섬긴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하루하루를 삼가하여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신하를 대할 때 공손하며, 혹 죄지은 사람이 있어도 그 경중()을 법대로 논의하시면, 태평의 위업을 곧 기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태조께서는 궁내에 소속된 노비91)가 궁궐에서 공역할 때를 제외하고는 밖으로 나가 교외에 살면서 토지92)를 갈아 세를 바치게 하였습니다.93) 그러나 광종 때에 이르러 불사()를 많이 일으켜 부역이 날로 많아지니 밖에 살던 노비까지 불러들여 부역에 충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궁()의 비용94)으로는 경비 지급이 충분하지 못하여 창고의 쌀까지도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폐단이 전하의 시대에도 아직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또 궁궐 내에서 기르는 말의 수가 많아 비용이 매우 많이 드는 관계로 백성들이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국경에 환란이 있게 되면 군량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태조의 제도에 의거하여 궁궐 안의 노비와 마구간에 있는 말의 수를 적절히 제한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내보내십시오.

() 세속에서는 선을 베푼다는 명목으로 각기 소원에 따라 사원을 지으니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또 중앙과 지방의 승려들도 자기가 거주할 곳을 마련하고자 다투어 공사를 행하면서 주군의 장리()95)들에게 백성을 징발하여 부역시킬 것을 권장합니다. 이로 인해 그러한 사역()이 공역보다 급하여 백성들이 이를 매우 괴롭게 여깁니다. 바라건대 엄중하게 이를 금지하여96)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시기 바랍니다.

() 『예기』에, ‘천자의 마루높이는 아홉 척이요, 제후의 마루높이는 일곱 척이다.’고 하였으니, 나름대로 정해진 제도가 있습니다. 근래에는 사람들이 지위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단지 재력만 있으면 모두 집 짓는 일을 먼저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주·군·현 및 정()97)·역·진도()98)의 세력가들이 다투어 큰 집을 지어 제도를 위반하게 되니, 이는 다만 한 집의 힘을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바라건대 예관()에게 명을 내려 지위와 신분의 귀천에 따라 가옥의 제도를 적절히 규정해 중앙과 지방에서 이를 준수하게 하고, 이미 지어진 가옥 중에 규정을 위반한 것은 헐어버리게 하여 장래를 경계하도록 해야겠습니다.

() 불경을 베끼고99) 불상을 만드는 일은 단지 오래도록 전하려는 것일 뿐인데 무엇 하러 진귀한 보배로 장식을 하여 도적들의 마음을 자극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예전에는 불경은 모두 누런 종이를 사용하였고 전단목()으로 축을 만들었으며, 그 초상()은 금·은·동·철을 쓰지 않고 돌·흙·나무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훔치거나 훼손시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라 말 불경과 불상은 모두 금·은을 사용하여 사치의 정도가 지나쳤으므로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장사치들은 불상을 훔치거나 부수어 서로 매매함으로써 생계를 삼았는데 최근까지도 그 관습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이런 일을 엄하게 금지시켜서 그 폐단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 옛날 진()나라에 덕이 쇠하자 난()·극()·서()·원()·호()·속()·경()·백() 등의 귀족 성씨100)가 강등되어 천민에 예속되었습니다. 우리 삼한공신()101)의 자손들은 매번102)내린 교지마다 반드시 포상하고 등용한다고 하였으나, 아직 벼슬을 받은 사람 없이 천민에 섞여있으니, 신진 관료들이 업신여기는 행동을 제멋대로 하여 원망과 탄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광종 말년에는 조정의 신하를 죽이고 쫓아내는 바람에 훈구세가 자손이 제대로 가문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여러 차례 내리신 은혜롭고 너그러운 교지에 의거하여 그 공신의 등급에 따라 자손을 등용하십시오. 또한 경자년(태조 23년, 940)에 전과( : 역분전)를 받은 사람과 삼한() 통일 후에 벼슬살이한 사람에게도 역시 그 공을 참작해 관계와 관직을 준다면 원통하게 쓴 누명을 풀 수 있어 재해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 불교를 존숭하여 믿는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제왕()·사대부·백성들이 공덕을 닦는 일은 실제로 이와 다릅니다. 서민의 경우 수고하는 것은 자신의 힘이며 소비하는 것도 자기의 재물이므로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왕의 경우에는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소비하게 됩니다. 옛날에 양나라 무제()는 존귀한 천자로서 필부의 선덕을 닦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 여겼던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왕들은 이러한 이치를 깊이 고려하고 일마다 모두 중용()을 참작하여 폐단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게 했습니다.

듣건대, 사람의 화복과 귀천은 모두 태어나면서 받는다고 하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물며 불교를 믿는 것은 내세의 인과()만 심을 뿐이며 현세에서 받는 결과[103)]에 이익이 적으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여기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불교·유교·도교의 3교는 각기 중요롭게 여기는 바가 있으니, 그것을 섞어 하나로 묶을 수 없습니다. 불교를 믿는 것은 자신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입니다. 자신을 닦는 일은 내세를 위한 바탕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가깝고 내세는 지극히 머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은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치우침이 없이 널리 만물을 구제해야 합니다. 어찌 원하지 않는 사람을 노역시키고 창고의 저축을 소비하면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익을 얻어야겠습니까? 옛날에 당나라 덕종() 왕비의 부친인 왕경선()과 부마인 고염()이 황제의 수명 연장을 위하여 금동 불상을 주조하여 바쳤더니, 덕종이 ‘나는 억지로 만든 공덕은 공덕이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라 하고, 그 불상을 두 사람에게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마음이 실제와 부합하지 못했기는 하나, 신하와 백성들에게 이익 없는 일을 못하게 하고자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 조정에 겨울·여름의 강회() 및 선왕()·선후()의 기일재()104)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함부로 취하거나 버릴 수는 없지만, 그 나머지 줄일 수 있는 불교 행사는 줄이길 바랍니다. 만약 줄일 수 없다면, 『예기』의 월령()105)에서 말한 내용을 따르셔야 합니다. 즉 ‘5월 중기( : 하지)는 음기와 양기가 다투고 죽음과 삶이 나누어지는 때이니, 군자는 재계하고 거처함에 반드시 몸을 숨기고 조급하게 굴지 말 것이며, 음악과 여색을 멀리하고 좋은 음식을 적게 먹어 기호와 욕심을 절제하여 심기를 안정시킬 것이며, 모든 관료들은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형벌을 없애서[106)] 음기가 이룩되는 것을 안정시켜야 할 것[107)]이다. 11월 중기( : 동지)는 음기와 양기가 다투고 모든 생명이 움트는 때이니, 군자는 재계하고 거처함에 반드시 몸을 숨기고 조급하게 굴지 말 것이며, 음악과 여색을 물리치고 기호와 욕심을 금지하여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며,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하면서 음기와 양기가 안정되는 것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5월과 11월에는 불사를 정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혹독하게 추우면 일하는 사람이 고통스럽고 음식물이 정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너무 더우면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뭇 독충들로부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으며 재에 받치는 음식이 정결하지 못할 것이니,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또 오늘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해도 내일 반드시 그에 따른 보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정치와 교화를 잘 시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바라건대 한해의 열두 달을 반으로 나누어 2월부터 4월까지와 8월부터 10월까지는 정사와 공덕을 반반씩 시행하시고, 5월부터 7월까지와 11월부터 정월까지는 공덕을 제외하고 오로지 정사만 닦아 날마다 정사를 듣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오후에는 군자가 사계절에 쓰는 의례를 지키면서 정사를 잘 돌보고 몸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시면 계절에 순응하게 되어 성상의 몸도 편안하시고 신하와 백성의 노고도 덜게 될 것이니, 어찌 큰 공덕이 아니겠습니까?

() 『논어』에는 ‘자기가 섬길 귀신이 아닌데도 이를 제사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다.’108)고 했고, 『좌전』에는, ‘귀신도 그의 동족이 아니면 제사를 받지 않는다.’109)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잘못된 제사에는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정에는 종묘와 사직의 제사가 아직도 법식대로 행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산악의 제사와 성수의 초제는 번잡스럽게 지내어 정도를 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제사는 자주 지내지 않아야 하는 법이니, 자주 지내면 번거롭고, 번거롭게 되면 공경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상께서 마음을 맑게 하고 공경을 다하여 진실로 게으른 태도가 없다고 하나, 향관( : 제사를 맡은 관리)들이 으레 하는 일이거니 여겨 싫증이 나서 공경을 다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그 제사를 흠향하겠습니까?

옛날 한나라 문제()는 제사지낼 때에 해당 관리들에게 공경히 지내되 복을 빌지는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식견은 탁월하여 훌륭한 덕이라 할 만합니다. 가령 천지신명이 사사롭게 복을 비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복을 내릴 수 있겠으며, 만약 사사롭게 복을 비는 것을 안다면 이는 자기 이익을 챙기고 잘 보이길 바라는 일로 군자를 기쁘게 하기도 어려울 것인데 천지신명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제사의 비용은 모두 백성의 고혈과 부역에서 나오는 것이니, 저의 어리석은 생각에 만일 백성의 부역을 쉬게 하여 환심을 얻는다면 그 복은 반드시 빌어서 얻는 복보다 많을 것이라 여깁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별도의 법식으로 하는 기도와 제사를 없애고, 늘 스스로 공손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품어 그것이 하늘에 이르면, 재해는 절로 물러가고 복록은 절로 오게 될 것입니다.

() 우리 조정에서 양인과 천인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창업한 초기에 여러 신하들 가운데 본래 노비를 소유했던 사람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본래 소유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종군하여 포로를 얻거나 재화로 사서 노비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태조께서 일찍이 포로를 풀어주어 양인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공신의 뜻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편리한 대로 따르도록 허락하였는데, 예순 남짓한 해가 지나도록 호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광종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노비를 조사110)하여 그 시비를 가리게 하니, 이에 공신들이 탄식하고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간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대목왕후()께서 간절히 간하였지만 임금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천한 노비들이 뜻을 얻어 존귀한 사람들을 능멸하여 업신여기고, 앞 다투어 허위 사실을 꾸며 본래의 주인을 모함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광종은 스스로 화의 원인을 만들어 놓고 그 피해를 막지 못했으며, 말년에 이르러 억울하게 사람을 죽여[111)] 덕을 크게 잃었습니다.

옛날 후경()112)이 양나라의 궁성을 포위하니, 임금의 측근인 주이()의 집 종이 성을 뛰어넘어 후경에게 투항하였습니다. 후경이 그 종에게 의동()113)이라는 벼슬을 주자, 그 종은 말을 타고 비단 옷을 걸치고서 성으로 가, ‘주이는 50년간 벼슬살이하여 겨우 중령군()이 되었으나, 나는 후왕에게 처음 벼슬살이하여 벌써 의동이 되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이에 성안의 종들이 다투어 나와서 후경에게 투항하므로 궁성이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난 일을 거울삼아 천한 노비들이 귀한 이들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시고, 노비와 주인과의 관계를 적절히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대개 벼슬이 높은 사람은 도리를 알아서 법에 어긋난 행위가 적으며, 벼슬이 낮은 사람도 단지 그의 지혜가 충분히 자기의 나쁜 짓을 덮을 수 없다면 어찌 양인을 천인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궁원()과 공경() 가운데, 위세로써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혹시 있다 할지라도, 지금의 정치가 거울처럼 밝고 사사로운 것이 없으니 어찌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주나라의 유왕()과 여왕()이 도를 잃었다 하여도 선왕()과 평왕()의 덕을 가릴 수 없었으며, 한나라의 여후()가 덕이 없다 하여도 한나라의 문제()와 경제()의 어짐에 누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 판결을 주관하시면서 중요한 일은 상세하고 명백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할 것이며, 앞 시대에 판결한 사건은 자꾸 캐내고 따져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단서를 열지 않아야 합니다.”

최승로는 왕이 뜻을 가지고 있어 함께 좋은 정치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글을 올렸다. 위의 스물 두개 조항 이외, 나머지 여섯 조항114)은 사서에 전해지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승로 [崔承老]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

2014년 11월 11일 화요일

고대 - 삼국지 위서 동이전 서

 왕제에 이런 말이 있다.

  동방을 이라고 한다. 이란 저이니 어질고 물건 살리기를 좋아해서 만 가지 물건이 땅에 뿌리 박고 난다는 말이다. 그런 때문에 그들은 천성이 유순해서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기가 쉬워서 심지어 군자는 죽지 않는 나라까지 있다.

  이는 아홉 가지 종류가 있다. 그것은 견이, 우이, 방이, 황이, 백이, 적이, 현이, 풍이, 양이이다. 그런 때문에 공자도 구이에 살고자 했다.

  옛날 요 임금이 희중에게 명하여 우이에 자리를 잡으라 하고 이곳을 양곡이라 했다. 대개 이곳은 해가 돕는 곳이다.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어서 오랑캐들이 반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소강제 이후로 세상 사람들이 왕의 덕화에 복종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그들을 왕의 문에 손으로 모셔다가 그들의 음악과 춤을 듣고 보았다.

  걸은 포악하고 사나와서 모든 오랑캐들이 안으로 침략했다. 이것을 은탕은 혁명을 일으켜 쳐서 안정시켰다. 중정에 이르자 남이가 침략해 왔다. 이로부터 오랑캐들이 혹 복종할 때도 있고, 혹 반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三백여 년을 지낸 뒤에 무을이 쇠폐해지자 동이가 몹시 침입해 왔다. 이에 드디어 땅을 쪼개어 주고 회대로 옮긴 다음 차차 복판에 살기 시작했다.

  무왕이 주를 치자 숙신이 와서 석노와 고시를 바쳤다.

  관숙, 채숙이 반하자 주는 오랑캐들을 불러 유인해다가 주공이 이를 정벌하고 드디어 동이를 평정했다.

  강왕 때에 숙신이 다시 왔고, 뒤에 서이가 참람되게 왕호를 일컫고 구이를 이끌고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황하위까지 이르자 목왕은 그 세력이 바야흐로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쪽 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주장하게 했다.

  언왕은 황지 동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땅이 五백 리였다. 여기에서 인의를 행하여 백성을 다스리니 육지로만 와서 조회하는 자가 삼십육국이나 되었다.

  목왕은 뒤에 기, 녹같은 명마가 끄는 수레를 얻어 조부로 하여금 말을 몰게 한 다음 초나라에 말하여 서를 치게 하는데 하루 만에 초나라 땅에 다다랐다. 이리하여 초의 문왕은 크게 군사를 내어 서를 멸망시켰다.

  언왕은 어질기만 하고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차마 그 사람과 싸울 수가 없어 마침내 패하고 말았다. 이에 북쪽으로 팽성 무원현 동쪽 산 밑에 이르러 보니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만 명이나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산을 서산이라고 이름했다.

  여왕은 무도해서 회이가 침입해 왔다. 왕은 괵중에게 명하여 이를 치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라히여 선왕이 다시 소공에게 명하여 이를 쳐서 평정했다.

  유왕에 이르러 몹시 음란하자 사방의 오랑캐들이 다투어 침입했고, 제환공에 이르러서 패업을 이루어 이들을 물리쳤다.

  초영왕이 신에서 제후들을 회합시킬 때 역시 와서 회맹에 참례했다. 뒤에 월나라가 낭야로 옮기자 이들은 함께 가서 정벌하고 나서 드디어 남을 업신 여기고 사납게 굴었다.

  제후들이 조그만 나라들을 침략해 멸망시키고 진나라가 육국을 통일하자 그 회사에 있는 오랑캐들은 모두 흩어져서 백성의 집을 만들었다.

  진섭이 군사를 일으키자 천하가 허물어지니 연나라 사람 위만이 피하여 조선으로 가서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런 지 백여 년이 되자 무제가 멸망시켰다. 이에 동이가 비로소 서울에 통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왕망이 왕위를 빼앗아 차지하자 맥 땅 사람들이 변방을 침략하다가 건무 초년에 다시 와서 조공을 바쳤다. 이 때 요동태수 제동이 북쪽 지방을 위엄으로 억누르니 그 소문이 바다 밖에까지 진동했다. 이에 예맥, 왜, 한이 천 리 밖에서 와서 조헌했다.

  죽은 장화 이후로는 사신을 조빙하는 것을 서로 유통했고, 영초에 이르러서는 어려운 일이 많아서 비로소 들어와 침략하고 노략하기 시작했다.

  환제와 영제가 옳은 정치를 잃자 이것은 점점 번져 나갔다. 중흥한 뒤로는 사방 오랑캐들이 손으로 왔고, 비록 때로 괴이한 일이나 반하는 일이 있어도 사역이 끓어지지 않았다. 그런 때문에 나라의 풍속과 풍토를 대강이나마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동이들은 그곳 토착한 백성들을 데리고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어 혹은 변관 쓰고 비단옷 입으며, 그릇은 조두를 썼다. 그러므로 이른바 중국이 예를 잃었기 때문에 이것을 사이에 구했다는 것이다.

  대체로 만이와 융적을 통틀어 모두 사이라고 한 것은 마치 공후백자남을 모두 제후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고대 - 한서 조선전 (고조선)

  조선왕 만滿은 연나라 사람이다. 연燕나라가 전성할 때로부터 일찌기 진번조선眞蕃朝鮮을 침략해서 자기 나라에 붙여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었다.

  그 뒤에 진나라가 연을 멸하자 요동 경계 밖을 소속시켰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그곳이 멀어서 지킬 수 없다고 해서 다시 요동의 옛날 요새를 수축하여 패수에 이르기까지로 경계를 삼아 연에 붙였다.

  연왕 노관盧 이 반해서 흉노로 들어가자 만은 망명해 달아났다. 그는 무리 천여 명을 모아가지고 머리에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달아나 새방 밖으로 나가 패수를 지나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하장上下障에 살았다. 여기에서 그는 차츰 진번조선 오랑캐와 옛날 연나라, 제나라에서 망명한 자를 모아서 왕노릇하고 왕검에 도읍을 정했다.

  마침 효혜고후孝惠高后 때를 당하여 천하가 처음 정착되자 요동태수는 곧 만에게 외신 자리를 주어서 새방 밖에 있는 오랑캐들을 막아 변방에 도둑질하지 못하게 하고, 또 오랑캐의 군장君長이 천자께 들어와 뵙겠다고 하면 이를 금지하지 말도록 약속하려고 조정에 알렸더니 천자는 이를 허락했다.

  이렇게 되어 만은 군사의 위엄과 재물을 얻을 수가 있어 이것으로 그 곁에 있는 조그만 고을들을 침략하여 항복받으니 진번, 임둔이 모두 그에게로 붙었다. 이리하여 땅이 수천 리가 되었고, 이로써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 우거에게 이르렀다.

  그러나 그가 유인해 온 한나라에서 도망 온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도 한 번도 천자에게 들어가 보는 일이 없었다. 진번과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고자 해도 또 그에게 막혀 통하지 않았다.

  원봉元封 2년에 한나라 사신 섭하涉何가 그를 책망하고 타이르려고 갔으나, 우거는 종시 천자의 조서를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하何는 돌아가려고 국경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랐다. 하는 갑자기 말을 달려 자기를 전송하려고 따라 나온 조선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이고 즉시 패수를 건너 새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는 돌아가서 천자에게 보고하기를, "조선 장수를 죽였습니다."하니 천자는 그의 한 일을 가상히 여겨 아무런 말도 묻지 않고 하를 遼東東部都尉로 삼았다.

  이로부터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내어 습격해서 마침내 하를 죽였다. 이것을 보고 천자는 죄인들을 모집해다가 조선을 쳤다. 그해 가을에는 또 누선장군 양복楊僕을 보내서 제나라로부터 발해로 건너가니 군사가 五만 명이었다.

  한편 좌장군 순체荀 는 요동으로 나가서 우거를 쳤다. 이에 우거는 군사를 내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은 요동 사람을 군사로 많이 거느리고 가서 먼저 공격했으나 패해서 흩어졌다. 도망해 되돌아온 자도 많았는데, 이들은 모두 법에 저촉되어 참형에 처하여졌다.

  누선樓船은 군사 7천 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險에 도착했다.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가 누선의 군사가 적은 것을 탐지하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의 군사는 패해 달아났다. 이에 장군 양복은 그 군사들을 잃고 산 속에 숨은 지 10여 일에 차츰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 모았다.

  좌장군은 조선 패수 서쪽 군사를 쳤으나 깨치지 못했다. 천자는 두 장수가 모두 싸움에 이롭지 못하다 해서 이에 위산衛山을 시켜 군사의 위세를 보이고 가서 우거를 타일러 보라 했다.

  우거는 사자를 보자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하고 항복하기를 원하여 [속여서 우리를 죽일까 두려워했더니 이제 신절信節을 보았으니 칭컨대 항복하겠습니다]했다.

  이리하여 태자를 보내서 들어가 사례하고 말 5천 필과 군사 먹일 양식을 바치게 하여 무리 만여 명이 병기를 가지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했지만, 사자와 좌장군은 그들에게 변이 있을까 의심이 났다. 그들은 [태자가 이미 항복했으니 사람들은 마땅히 병기를 갖지 말라]했다.

  한편 태자도 역시 사자나 좌장군에게 거짓이 있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드디어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위산이 이 사실을 천자께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베었다.

  이 때 좌장군은 패수 위에 있는 군사를 깨치고 앞으로 성 밑에 이르러 성 서쪽과 북쪽을 포위했다. 누선도 역시 여기에 달려가 성 남쪽에 군사를 주둔시키니 우거는 성을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이리하여 두어 달이 되도록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좌장군은 본래 천자를 모시어 왔고 장차 연나라의 대를 이을 터이므로 몹시 우쭐거리는 판인데, 이 때 싸움에 이기고 보니 군사들까지 교만한 기운이 많았다.

  한편 누선은 군사를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 이미 여러 번 패한 일이 있고, 또 먼젓번에 우거와 싸울 적에도 곤욕을 받아 군사를 잃은 터여서 그 군사를 잃은 터여서 그 군사들은 모두 두려운 마음을 가졌고, 장수들도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었다.

  이리하여 비록 우거를 포위는 했어도 언제나 화친할 의사를 가졌다.

  이 때 좌장군이 공격을 서두르자 조선의 대신들은 비밀히 사람을 보내서 사사로이 누선에게 항복하기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런 말이 오고 가기만 하고 아직 결정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까닭에 좌장군이 자주 누선을 보고 조선군과 싸울 것을 말했지만, 누선은 조선이 항복한다는 약속을 이루고자 하여 여기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또 좌장군도 역시 몰래 사람을 시켜 틈을 타서 조선으로 하여금 항복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조선은 이미 마음을 누선에게 주고 있었으므로 좌장군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 이러고 보니 두 장수들은 서로 마음이 맞을 리가 없었다.

  좌장군은 혼자 생각하기에, 누선이 전에는 군사를 잃은 죄가 있었고, 이제 또 조선과 사사로이 좋게 지내는데도 조선이 여전히 항복하지 않고 있음을 보면 혹시 반간反間하는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여 자기 역시 쉽게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고 천자는 말하기를, [전에 장졸들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기로 위산을 시켜 우거를 타일러 항복하게 했더니 일을 매듭 짓지 못하여 좌장군과는 계획이 서로 어긋나서 마침내 약속을 깨치게 되었었다. 그러던 터여서 이제 두 장수가 성을 포위했는데도 일이 이상하게만 되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오래도록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했다. 이에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서 가서 일을 바로잡도록 해서 편의대로 처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공손수가 도착하자 좌장군은 말하기를, [조선이 함락된 지 이미 오랬을 것이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누선이 여러 번 약속을 어기고 싸우지 않은 때문이오] 하고 자기의 뜻을 낱낱이 말했다.

  그러고 나서 좌장군은 다시 수遂에게 말하기를, [이제 형세가 이렇게 되었는데도 조선을 취하지 않으면 큰 해가 될까 두렵소. 그것은 비단 누선뿐만이 아니라, 그가 또 조선과 함께 군사를 합쳐 우리를 치러 올 것이오] 했다.

  이 말을 듣자 수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절부節符를 가지고 누선장군을 불러 좌장군 군중에 들어가 일을 계획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놓고 즉시 좌장군 휘하 군사를 시켜 누선장군과 그 군사들을 잡아 결박하게 하고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했다. 이리하여 천자는 수의 의견을 쫓았다.

  이리하여 좌장군은 마침네 두 군대를 합치게 되었다. 그리고 급히 조선을 치기 시작했다. 이 때 조선 정승 노인路人과 한도韓陶, 니계상尼谿相 삼參, 장군 왕협王  등이 서로 의논하기를, [처음에 우리가 누선에게 항복하려던 것이 이제는 누선이 잡혀 버리고 홀로 좌장군이 군사를 합쳐 이제 싸움이 더욱 급하니 그를 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했다.

  그러나 왕은 또 즐겨 항복하려 하지 안흥므로 한도와 협, 노인은 모두 도망해서 한나라에 항복했는데, 그 중에 노인은 중도에 죽었다.

  원봉 3년 여름에 니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했다. 그러나 王儉城만은 함락되지 않고 있었다.

  이 때 죽은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는 또 거듭 관리들을 공격했다. 이리하여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長과 항복한 정승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들을 달래고 성기를 베니 이로써 드디어 조선이 평정되었다.

  이에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사군四郡을 두고 삼參을 봉하여 획청후 淸侯를 삼고, 한도韓陶로 추저후秋 侯를 삼고, 협으로 평주후平州侯를 삼고, 장長으로 기후幾侯를 삼았다.

  한편 최근 그 아버지가 죽었고, 자못 공로가 있다 하여 저양후沮陽侯를 삼았다.

  좌장군을 불러 들였으나 앉아서 자기들의 공로를 다투다가 서로 미워하노라 계교를 어그러뜨렸다 해서 기시棄市의 형에 처했고, 누선장군도 역시 군사가 먼저 열구列口에 이르렀으면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옳은데 제 맘대로 먼저 군사를 내었다가 잃어버린 것이 많았다 하여 의당 베일 것이나 용서해서 서인庶人을 만들었다.

  찬贊에 이렇게 말했다.

   초나라 옛 조상 때는

   역대로 그 땅이 있었데.

   주나라 아무리 쇠했어도

   초나라 땅은 사방 五천 리는 되어

   구천句踐은 여기서 패업覇業 이루었네.

   진나라가 제후諸侯를 멸했어도

   오직 초나라에는 진왕 王 있었네.

   한나라가 서남쪽 오랑캐 베어도

   유독 진왕만은 사랑받았네.

   동東오가 나라 없어져 옮겨도

   모든 유왕과 거고들은

   오히려 만호후가 되었네.

   세 방위 모두 열리니

   모두 일 좋아하는 신하일세.

   서남쪽 오랑캐는 당몽 사마상여에게서 일어나고

   양오는 엄조 주매신에게서 어일났네.

   조선은 섭하로 해서 대마다 융성해졌고

   이로써 성공하여 부지런해졌네.

   태종의 사랑하고 위로한 은덕 보면

   이 어찌 예의로 부르고 덕으로 인도한 게 아니라 하랴.(漢書)

고대 - 한서 지리지 - 고조선

 진秦나라가 설치하여 유쥬幽州에 예속시켰음. 55,972戶. 인구는 272,539人. 현縣은 18.

  ○ 요동군遼東郡(秦나라때 설치함. 遼東城 동남부의 遼河 동쪽임)

  (1) 양평襄平: 목사관牧師官이 있음. 망莽은 이것을 창평昌平이라고 했다.

  (2) 신창新昌

  (3) 무려無慮: 서부도위西部都尉가 다스렸다. 사고師古는 말하기를, 무려는 즉 의무려醫無閭임.

  (4) 망평望平: 대요수大遼水는 새방 밖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 갔다. 물의 길이는 1,250리임.

  (5) 방房

  (6) 후성侯城: 중부도위中部都尉가 다스렸다.

  (7) 요수遼隊: 망莽은 이것을 순목順睦이라고 했고, 사고師古는 대隊를 수遂라고        발음했다.

  (8) 요양遼陽: 대양수大梁水는 서남쪽으로부터 흘러 요양에 이르러 요遼로 들어        갔음. 망은 이것을 요음遼陰이라고 했다.

  (9) 검독儉瀆: 응소應邵가 말하기를, 이것은 조선 왕 만滿이 도읍했던 곳이다.         물의 험한 것을 의지해서 자리잡았다 해서 검독儉瀆이라 했다. 신찬臣瓚은        말하기를, 왕검성王儉城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이곳부터 검독        이라 했다 고 했다. 사고師古는 찬瓚의 말이 옳다고 했다.

  (10) 거취居就: 실위산室僞山과 실위수室僞水가 여기에서 나왔으니, 북쪽으로 양         평襄平에 이르러 대양大粱으로 들어갔음.

  (11) 고현高顯

  (12) 안시安市

  (13) 무차武次: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리는 곳. 망莽은 무차를 항차桓次라고          했다.

  (14) 평곽平郭: 철관鐵官과 염관鹽官이 있음.

  (15) 서안평西安平: 망은 말하기를 이것을 부안평이라고 했다.

  (16) 문文: 망은 이것을 수정受亭이라고 했다.

  (17) 번한番汗: 패수沛水는 새방 밖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 응소         應邵는 말하기를, 한수汗水가 새방 밖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갔다고 했다.

  (18) 답씨沓氏: 응소는 말하기를, 이것을 답수라고 했다.



 ○ 현도군玄 郡(전한前漢 무제武帝가 세움.옥저의 옛 땅임. 고구려 광개토왕 때      고구려에 병합됨)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封 4년에 열었음. 45,000戶. 인구는 221,845명. 현縣은 셋      이다.

  (1) 고구려: 요산遼山은 요수遼水가 여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요대遼隊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갔음.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어 서남쪽으로 새방        밖을 지났다. 응소는 말하기를, 이것을 고구려호라고 했다.

  (2) 상은대上殷臺: 망은 하은下殷이라고 했다.

  (3) 서개마西蓋馬: 마자수馬 水는 서북쪽으로 흘러 들어갔고,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다. 군郡 둘을 지나고 길이가 2,100리        가 된다. 망은 이곳을 현도정玄 亭이라고 했다.



 ○ 낙랑군樂浪郡

    무제 원봉3년에 열었음. 망은 이곳은 낙선樂鮮으로서 유주幽州에 붙였다고 했      다. 응소는 이곳이 옛날 조선국이라 했다. 62,812戶요, 인구는 406,748人. 운장      雲 이 있음. 현縣은 25.

  (1) 조선朝鮮: 응소가 말하기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했다.

  (2) 남감

  (3) 패수沛水: 물이 서쪽으로 흘러 증지增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다. 망은 이        곳을 낙선정樂鮮亭이라고 했다.

  (4) 함자含資

  (5) 대수帶水: 서쪽으로 흘러 대방帶方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다.

  (6) 점제 蟬

  (7) 수성遂成

  (8) 증지增地: 망은 이곳을 증토增土라고 하였다.

  (9) 대방帶方

  (10) 사망駟望

  (11) 해명海冥: 망은 이곳을 해환海桓이라고 했다.

  (12) 열구列口

  (13) 장삼長岑

  (14) 둔유屯有

  (15) 소명昭明: 남부도위南部都尉가 다스림.

  (16) 누방鏤方

  (17) 제해혼미提奚渾彌

  (18) 탄열呑列: 분여산分黎山, 열수列水가 여기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흘러 점         제 蟬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는데 길이가 820리이다.

  (19) 동이東 

  (20) 불이不而: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림.

  (21) 잠태蠶台

  (22) 화려華麗

  (23) 사두매邪頭昧

  (24) 전막前莫

  (25) 요조夭祖

   연燕나라 땅은 미尾와 기箕(28숙宿의 하나. 모두 동방에 있는 별 이름으로 여기에서는 동쪽을 말함)에서 나뉜 들이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하고 나서 소공召公을 연에 봉했다. 그 뒤 36대가 되는 동안 그는 육국六國과 함께 왕이라고 일컬어, 동쪽으로는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 요동이 있고, 서쪽으로는 상곡上谷, 대군代郡, 안문雁門을 가졌으며, 남쪽으로는 탁군 郡의 이용성과 범양을 얻었고, 북쪽으로는 신성, 즉 옛날의 안탁현, 양향, 신창과 발해의 안차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연나라에서 나뉜 땅이다. 낙랑, 현도도 역시 여기에 소속되어야 할 것이다.

  연이 왕이라고 일컬은 지 십대가 되었을 때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멸하고자 했다. 이 때 연왕燕王의 태자 단丹이 용사 형가荊軻를 보내서 서쪽으로 가서 진왕秦王을 찔러 죽이려 했으나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베임을 당했다.

  이리하여 진나라에서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멸해 버렸다. 이 당시의 계 는 남으로 제나라와 조나라에 통하며 발해와 갈석蝎石 중간에 있는 한 도회都會였다.

  처음에 태자 단은 손님으로 용사들만 집에서 기르고 있어 후궁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백성들도 거기에 화하여 습관이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러하다. 손님들을 맞으면 자기 아내를 주어 모시고 자도록 하고, 시집 가는 첫날 밤에도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것을 도리어 영화롭게 여겨 왔는데, 뒤에는 차츰 조금씩 덜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종시 아주 고치지는 못했다.

  이리하여 그들의 풍속은 어리석고 사납고 생각이 적어 경박하고 위엄이 없었다. 그래도 역시 장점도 있기는 했으니, 남의 급한 일을 보면 용감하게 뛰어드는 성질이 있었으니 이것은 곧 단의 남긴 풍도이다.

  상곡上谷으로부터 요동에 이르기까지 땅은 넓고 백성은 드물어 자주 오랑캐들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풍속은 조趙나라 시대와 서로 비슷한데 생선과 소금.대추.밤 같은 것이 풍족히 났다.

  북쪽으로는 오환烏丸, 부여夫餘와 틈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진번의 이로움을 사 들이고 있었다. 현도와 낙랑은 무제 때 설치했는데, 이것은 모두 조선, 예맥濊貊, 구려만이句驪蠻夷이다.

  은殷나라의 도道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을 예의에 힘쓰고, 농사짓고 누에 쳐서 길쌈 하도록 가르쳤다. 또 낙랑의 조선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팔조목을 만들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받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그것이 남자일 경우에는 그 집 남자 종을 만들고 여자일 경우에는 역시 여자 종을 만든다. 자기가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 앞에 오십만 냥을 내게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될 때도 풍속에 역시 그들은 부끄러움을 씻지는 못한다. 아내를 얻는 데는 원수를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그 백성들은 종시 도둑질을 하지 않아서 대문을 닫고 자는 법이 없었다.

  여자들은 모두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 그 지방의 농사 짓는 백성들은 대나무 그릇에 음식을 먹고, 도시에서는 관리나 장사꾼들을 본받아서 왕왕히 술잔 같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는다.

  군에서는 처음에 요동에 가서 관리를 데려 왔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물건을 숨기거나 감추어 두는 법이 없는 것을 보았으나 장사꾼들이 오면 밤에 도둑질을 하게 되어 풍속이 차츰 박해갔다.

  지금에 와서는 법으로 금하는 것이 더 많아져서 육십여 조목이 되었으니, 어질고 착한 것의 감화야말로 귀한 것이다.

  그러나 동이東夷는 천성이 유순해서 세 지방 밖의 사람들과 다르다. 그런 때문에 공자가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여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에 살고자 한 것이 까닭이 있다.

  대체로 낙랑 바다 속에는 왜인倭人들이 살고 있어 나누어 백여 나라가 되는데 이들은 해마다 와서 물건을 바치고 뵙는다고 한다. 그 지방은 위危 사도四度로부터 두 육도六道에 이르는 곳을 석목析木의 다음 위치라고 하는데, 이곳은 연燕나라에서 나뉜 곳이다.(漢書)

고대 - 사기 조선전 (고조선)

장안(長安)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의 세 물이 있어 이것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고 했다. 아마 낙랑(樂浪)이나 조선은 여기에서 이름을 딴 것인 듯 싶다. 조선(朝鮮) 임금 만(滿)(漢書에 보면 滿은 燕人으로 성은 衛이다. 조선왕을 쳐서 없애고 자기가 왕노릇을 했다고 했다)이란 자는 옛날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가 전성할 때(연나라가 전성할 때란 6나라 중에 연나라가 전성해서 항상 두 나라를 침략하여 자기 나라에 붙일 때를 말함)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과 조선을 침략하여 자기 나라에 붙이고 관리를 두고 장세( 塞)(국경에 있는 요새)를 쌓았었다.

   진(秦)이 연을 멸하자 요동(遼東) 밖 변방을 자기 땅에 붙였다. 그러나 한(漢)이 일어나자 지방이 멀어서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요동의 옛날 요새를 수리하여 패수浿水(地理志에 보면 浿水는 요동 밖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낙랑현을 거쳐 서쪽으로 바다로 들어갔다고 씌어 있다. 즉 지금의 압록강)에 이르러 경계를 삼아 연에 붙였다. 연왕燕王 노관盧 (漢의 豊땅 사람. 高祖와 같은 고향으로서 같은 날에 났다. 고조가 沛 당에서 일어나자 그는 고조를 따라 장군이 되어 장두(藏茶)를 깨쳐 연왕이 되었다. 그러나 뒤에 陳 의 일로 해서 의심을 받아 흉노로 도망해서 東胡盧王에 봉해짐)이 반叛해서 흉노(북쪽 오랑캐의 하나. 몽고족 또는 토이기족의 분파라 함)로 들어가자 만은 도망해서 무리 천여명을 모아 가지고 북상투를 하고 오랑캐의 옷을 입은 채 동쪽으로 달아나 국경을 지나서 패수를 건넜다. 이리하여 진나라의 옛날 빈 터인 상하장上下 (지리지에 보면 낙랑에 雲 이란 땅이 있다)에서 살았다. 여기에서 그는 차츰 진번(漢의 4군의 하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으며, 임둔과 함께 폐지되었고, 그 일부가 낙랑에 병합됨)과 조선, 그리고 오랑캐 및 옛날 연과 제齊에서 도망한 자들을 자기에게 붙여 왕노릇하고 왕검王儉(지리지에 보면 요동에 儉瀆縣이 있었으니 이 곳은 조선왕의 옛 도읍터라고 했다. 또는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을 정했다.

   이 때는 마침 효혜고후孝惠高后 때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었을 무렵이다. 요동태수遼東太守가 만으로 외신外臣을 삼아서 국경 밖 오랑캐들을 막아서 변방에서 도둑질을 하지 못하게 하고, 또 모든 오랑캐의 군장君長들이 천자께 들어가 뵙고자 하는 자는 이를 금지하지 않도록 했다.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니 천자도 이를 허락했다. 이 때문에 만은 군사의 위엄과 재물을 얻게 되자 그 곁에 있는 조그만 고을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의 하나. 낙랑군의 동쪽, 곧 함경남도와 강원도 지방. 진번과 같이 폐지되었으며, 그 일부가 玄 에 합쳐졌다가 다시 낙랑에 귀속됨)이 모두 와서 항복하여 땅이 수천 리나 되었다.

   만은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 우거右渠(만의 손자 이름)에게 이르자 한나라에서 도망쳐 그에게로 돌아간 사람들이 몹시 많아졌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들어와서 천자를 뵙는 일이 없고, 진번의 곁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고자 해도 역시 천자를 가로막아 그들을 막아서 통하지 못하게 했다.

   원봉元封(한나라 무제의 연호. 원봉2년은 서기 109년)12년에 한나라 사신 섭하涉何가 와서 타일렀지만 우거는 종시 조서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에 섭하는 바로 국경 위로 가 패수에 임해서 자기를 따라온 부하를 시켜 마중나온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이란 자를 죽인 다음 곧 달려서 새방(平州 楡林關을 말함)으로 들어갔다. 돌아와서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여 자기가 조선 장수를 죽였다고 하자, 천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더 묻지 않고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지리지에 보면,요동군 무차현武次縣이 곧 동부도위가 다스리던 땅이다)를 삼았다. 이에 조선에서는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내어 섭하를 공격해 죽였다. 한편 천자는 죄인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쳤다. 그 해 가을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박楊僕을 보내서 제나라로부터 발해渤海로 건너가는데 군사 5만명을 거느리게 했다. 또 좌장군 荀 는 요동으로 나와서 우거를 치니 우거도 군사를 내어 험한 곳에서 이를 막았다. 이 때 좌장군은 요동 군사를 많이 거느리고 먼저 갔었으나 패하여 흩어지니 군사들은 도망해 돌ㅇ간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법으로 다스려 죽였다.

  한편 누선장군은 제나라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에 이르니 우거가 성을 지키고 있다. 우거는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탐지하여 알고 곧 성에서 나와 누선장군의 군사를 습격하자 누선의 군사는 패해 흩어졌다. 장군 양복은 군중들을 잃고 산 속으로 들어가 숨은 지 10여일에 차츰 흩어진 군사들을 수스하여 다시 모이게 했다. 또 좌장군도 조선 패수 서쪽 군사를 쳤으나 적을 파하고 앞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이에 천자는 두 장수가 모두 싸움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위산衛山을 시켜 군사의 위엄을 보이고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했다. 우거는 사자를 보자 머리를 조아리면서 항복하기를 원했다. 그는 말하기를, "두 장수가 속여서 신을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했더니 이제 신절臣節(거짓 없는 표적)을 보니 청컨대 항복하겠나이다" 했다. 이에 우거는 태자를 보내서 들어가 사죄하고 말 5천 필과 군사 먹일 양식을 바치고 군사 만여명이 모두 병기를 가지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오려 한다. 이것을 보고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그들에게 변이 있을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할태면 군사들에게 명하여 병기는 갖지 못하게 하라"했다. 이에 태자도 역시 사자와 좌장군이 자기를 속여 죽이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드디어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사자 위산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자 천자는 한편 좌장군은 패수 위의 군사를 파하고 앞으로 성 밑에 나가 그 서북쪽을 포위하고 누선도 역시 가서 성 남쪽을 점령하자 우거는 하는 수 없이 굳게 성을 지키니 여러 달이 되어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좌장군은 일찍이 천자를 모셨던 일이 있는데다가 연대燕代의 군사를 거느렸으니, 그러나 그는 성질이 사납고 더욱기 이긴 기세를 타서 군사들에게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 누선은 제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갔으나 이미 패해 도망한 자들이 많았다. 또 먼젓번에 우거와 싸울 적에 곤욕을 당하고 군사가 많이 죽었으므로 모두 싸움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좌장군은 마음 속으로 부끄럽게 여겨서 비록 우거를 포위는 했어도 언제나 화해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좌장군이 급히 공격하자 조선의 대신들은 비밀히 사람을 보내서 사사로이 누선에게 항복할 것을 약속하고 있었으나, 사람들이 왕래하는 중이어서 말이 아직 완전히 결정은 되지 않았다. 이때 좌장군은 자주 누선과 사울 것을 재촉했으니, 누선은 화해할 약속을 급히 이루고자 하여 사움에 응하지 않았다. 마음은 이미 누선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때문에 두 장수는 서로 사이가 좋아질 수가 없었다. 또 좌장군은 생각하기를, 누선이 전에는 싸움에 져서 군사를 잃은 죄가 있었고, 또 지금은 조선과 사사로이 좋게 지내면서도 조선은 항복하지 않고 있으니 필시 반叛할 계교가 있는 것이라 의심하고 감히 군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천자가 말하기를,"이제 장졸들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기로 위산을 시켜서 우거가 항복하도록 타이르게 했었다. 이리하여 우거가 태자를 보냈으나, 위산은 능히 일을 자기 맘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좌장군과 계획이 서로 어긋나서 마침내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두 장수는 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서로 생각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할지 결정짓지 못하고 있는 터이다. 이에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서 일을 바로 잡도록 하는 것이니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라"했다.

   이리하여 공손수가 전지로 나가자 좌장군이 말하기를, "조선은 마땅히 항복한 지 오랬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항복하지 않은 것은 그 까닭이 있다. 그것은 누선이 여러 번 약속하고서도 만나주지 않은 때문이다"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좌장군은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낱낱이 말하고 나서 수遂에게, "이제 형편이 이렇게 되었는 데도 그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큰 해가 될까 두렵다. 누선만이 변을 일으킬 것만이 아니라, 또 그는 조선과 함께 군사를 합쳐 가지고 우리를 멸할 것이다" 했다. 이에 수遂도 역시 그 말을 옳게 여겨 절부節符를 가지고 누선장군을 불러서 좌장군의 영營에 들어가 일을 게획하게 했다. 이리하여 즉시 좌장군의 휘하麾下 장수에게 명하여 누선장군을 체포하고 그 군대를 좌장군에 합친 뒤 천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천자는 수遂를 벌주었다. 장군은 이미 두 군사를 합치자 이내 급히 조선을 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는 정승 路人(索隱에 보면 路人은 漁陽縣 사람 如淳이라 했다), 정승 한도韓陶, 니계상尼谿相 삼參, 장군 협 이 서로 의논하기를, "처음에우리는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던 것인데 이제 누선은 체포되었고, 좌장군이 그의 군사들까지 합쳐서 사움이 더욱 급하니 우리는 능히 저들과 사울 수가 없다"하였다. 그러나 왕은 즐겨 항복하려 하지 않아서 한도.협.노인은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했고, 노인은 도중에서 죽었다.

   원봉3년 여름에 니게상 삼은 이에 사람을 시켜 조선 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항복했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고 죽은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는 여러 번 거듭 관리들을 못살게 굴었다. 이에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長과 항복한 정승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 백성들을 잘 타이르게 하고 성기를 죽였다. 이리하여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여 네 군(이 4군이라는 것은 즉 진번.임둔.낙랑.현도이다)을 만들고 삼參을 봉하여 획청후 淸侯를 삼고 도陶를 추저후萩 侯를 삼고, 협으로 평주후平州侯를 삼고, 장長으로 기후幾侯를 삼았다. 또 최最는 그 아비가 죽었을 뿐 아니라, 자못 공이 있다고 해서 온양후溫陽侯를 삼았다. 좌장군을 불러 들이자 앉아서 공을 다투노라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여 모든 계획을 잘못한 죄를 물어 기시棄市의 형에 처했다. 또 누선장군은 군사가 열구洌口에 이르러 좌장군을 기다려야 했을 것인데도 자기 맘대로 많이 싸워서 많은 사상자를 낸 죄를 물어 마땅히 죽일 것이나 용서해서 서인庶人을 만들었다.

   태사공은 말하기를 '우거는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했고, 섭한는 공을 도둑질 했다가 적의 군사에게 머리를 잃었으며, 누선은 장졸ㅇ이 적은 것을 가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 제 허물을 벗어나려 했다. 그리하여 번우를 잃고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수와 더불어 전공을 다투다가 둘 다 함께 죽음을 당해서 두 군사가 모두 욕 되었으며, 장수로서 봉후된 사람이 없었다.'(史記)

조선 후기 - 경세유표 - 사민구직(사민평등)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의 전지(田地)는 10경(頃)이고 그 아들은 10명이라고 하자. 그 들 중 한 아들은 전지 3경을 얻고, 두 아들은 2경을 얻고, 나머지 네 아들은 전지를 얻지 못하여 울면서 길거리에서 뒹굴다가 굶어죽게 된다면 그 사람을 부모 노릇 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늘이 백성을 내릴 적에 먼저 전지를 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먹고 살게 하였고, 또 한 백성을 위하여 군주(君主)와 목민관(牧民官)을 세워 그들의 부모가 되게 하였으며, 백성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여 다 함께 잘 살도록 하였다.

 그런데도 군주와 목민관이 팔장만 끼고 앉아 아무 일도 안 한다면, 그 아들이 서로 싸워서 재산을 빼앗고 자기에게 합치는 일을 못하게 막을 자는 누구란 말인가? 힘센 자 는 더 많이 얻게 되고 약한 자는 떠밀리어 땅에 넘어져 죽게 된다면, 그 군주와 목민관된 자는 남의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백성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여 다 함께 살 수 있도록 한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 노릇을 잘 한 사람이요, 백성들의 재산을 균등하게 하지 못하여 다같이 살 수 있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군주와 목민관의 직무를 저버린 사람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전지를 갖게 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전지를 갖지 못하게 하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곡식을 분배받게 되고,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곡식을 분배받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공장(工匠)은 그들이 만든 기구로써 곡식을 바꾸게 되고 상인은 화물(貨物)로써 양곡을 사게 되면 아무 지장이 없게 된다.

선비는 열 손가락이 유약하여 힘든 작업을 감당하지 못하니 밭을 갈겠는가, 김을 매겠는가, 거름을 주겠는가? 그들의 이름이 노동 기록 장부에 기록되지 못하면 가을에 곡식 분배를 받지 못할 것이다. 아아, 내가 여전법(閭田法)을 시행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대체 선비란 무엇하는 사람인가? 어찌하여 선비는 손발도 놀리지 아니하고 땅에 생산된 것을 빼앗아 먹으며 남이 노동한 것을 삼켜 먹는가?

대저 선비가 놀고 먹기 때문에 땅에서 나는 이(利)가 다 개척되고 있다. 놀고서는 곡식을 분배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또한 장차 직업을 옮겨 농사를 지을 것이다. 선비 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꾼이 되면 땅에서는 이(利)도 개척되고 선비가 직업을 바꾸어 농사꾼이 되면 난민(難民)도 없어질 것이다.

 선비 중에는 반드시 직업을 바꾸어서 농사꾼으로 되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니, 이런 경우에는 장차 어찌할 것인가? 공장(工匠)과 상인으로 변하는 자도 있을 것이며, 아침에는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옛 사람의 서적을 읽는 자도 있을 것이며, 부유한 사람의 자제를 가르치는 것으로 살 길을 구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또 한 실리(實利)를 강구(講究)하여 토지에 적합한 농작물을 분별하고 수리(水利)를 일으키며 기구를 제작하여 인력을 덜어주기도 하고 농사 기술과 목축업을 가르쳐서 농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는 그 공을 어찌 육체 노동하는 사람과 견줄 수 있겠는가? 하루의 일을 열흘로 기록하고 열흘 동안 한 일을 백일로 기록하여 그에 따라 곡식(穀食)을 분배받아야 옳을 것이다. 선비에게 어찌 분배(分配)가 없겠는가?

고려 - 동명왕편

계축년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 를 얻어 “동명왕(東明王)”의 본기(本紀)를 읽어보니 그 신이(神異)한 사적이 세상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욱 상세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신이요 요술이라 생각했으나 세 번 반복하여 탐독하고 완미(玩味)하여 보니 요술이 아니요 성(聖)이며 귀신이 아니요 신(神)이었다.……중략……동명왕의 사적은 변화의 신이한 것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요 실로 나라를 창시한 신이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훗날 무엇을 볼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노니 천하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알게 하려 함이다.



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고율시(古律詩)
동명왕편(東明王篇) 병서(幷序)

세상에서 동명왕(東明王)의 신통하고 이상한 일을 많이 말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흔히 그 일을 말한다. 내가 일찍이 그 얘기를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선사(先師) 중니(仲尼)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았다. 동명왕의 일은 실로 황당하고 기괴하여 우리들이 얘기할 것이 못된다.”하였다.
 뒤에 《위서(魏書)》와 《통전(通典)》을 읽어 보니 역시 그 일을 실었으나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였으니, 국내의 것은 자세히 하고 외국의 것은 소략히 하려는 뜻인지도 모른다.

지난 계축년(1193, 명종 23) 4월에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본기(東明王本紀)를 보니 그 신이(神異)한 사적이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지 못하고 귀(鬼)나 환(幻)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세 번 반복하여 읽어서 점점 그 근원에 들어가니, 환(幻)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하물며 국사(國史)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니 어찌 허탄한 것을 전하였으랴. 김부식(金公富軾) 공이 국사를 중찬(重撰)할 때에 자못 그 일을 생략하였으니, 공은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이 아닌가?

당현종본기(唐玄宗本紀)와 양귀비전(楊貴妃傳)에는 방사(方士)가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갔다는 일이 없는데, 오직 시인(詩人) 백낙천(白樂天)이 그 일이 인멸될 것을 두려워하여 노래를 지어 기록하였다. 저것은 실로 황당하고 음란하고 기괴하고 허탄한 일인데도 오히려 읊어서 후세에 보였거든, 더구나 동명왕의 일은 변화의 신이(神異)한 것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고 실로 나라를 창시(創始)한 신기한 사적이니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인들이 장차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聖人)의 나라라는 것을 천하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한 덩어리로 뭉친 원기 갈라져서 / 元氣判渾
천황씨 지황씨가 되었다 / 天皇地皇氏
머리가 열 셋 혹은 열 하나 / 十三十一頭
그 모습 기이함이 많았다 / 體貌多奇異
그 나머지 성스러운 제왕들도 / 其餘聖帝王
경서와 사기에 실려 있다 / 亦備載經史
여절은 큰 별에 감응되어 / 女節感大星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지를 낳았고 / 乃生大昊摯
여추는 전욱을 낳았는데 / 女樞生?頊
역시 북두성(北斗星)의 광채에 감응되었다 / 亦感瑤光暐
복희씨는 희생 제도를 마련하였고 / 伏羲制牲犧
수인씨는 나무를 비벼 불을 만들어 냈다 / 燧人始鑽燧
명협(蓂莢)이 난 것은 요(堯) 임금의 상서요 / 生蓂高帝祥
서속을 내린 것은 신농씨의 상서다 / 雨粟神農瑞
푸른 하늘은 여와씨가 기웠고 / 靑天女?補
큰 물은 우(禹) 임금이 다스렸다 / 洪水大禹理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가 하늘에 오르려 할 제 / 黃帝將升天
턱에 수염 난 용이 스스로 이르렀다 / 胡髥龍自至
태고 적 순박할 때는 / 太古淳朴時
신령하고 성스러운 것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는데 / 靈聖難備記
후세에 인정이 점점 경박해져서 / 後世漸??
풍속이 지나치게 사치해졌다 / 風俗例汰侈
성인이 간혹 나기는 하였으나 / 聖人間或生
신령한 자취 보인 것이 적다 / 神迹少所示
한 나라 신작 삼년 / 漢神雀三年
첫여름 북두가 사방(巳方)을 가리킬 때 / 孟夏斗立巳
한 나라 신작 3년 4월 갑인(甲寅)
해동 해모수는 / 海東解慕漱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 / 眞是天之子

본기(本記)에 이렇게 적혀 있다.
부여왕(夫餘王) 해부루(解負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山川)에 제사하여 아들 낳기를 빌러 가는데,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자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어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니 금빛 나는 개구리 형상의 작은 아이가 있었다.

왕이,“이것은 하늘이 내게 아들을 준 것이다.”하며, 길러서 금와(金蛙)라 하고 태자(太子)로 삼았다. 정승 아란불(阿蘭弗)이, “일전에 천제(天帝)가 내게 내려와서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피하라.’하였는데, 동해(東海) 가에 가섭원(迦葉原)이란 땅이 있어 오곡(五穀)이 잘 되니 도읍할 만합니다.”하고, 아란불은 왕을 권하여 옮겨 도읍하고 동부여(東夫餘)라 이름하였다.
예전 도읍터에는 해모수(解慕漱)가 천제의 아들이 되어 와서 도읍하였다.

처음 공중에서 내려오는데 / 初從空中下
자신은 다섯 용의 수레를 타고 / 身乘五龍軌
따르는 사람 백여 인은 / 從者百餘人
고니를 타고 털깃 옷을 화려하게 입었다 / 騎鵠紛??
맑은 풍악 소리 쟁쟁하게 울리고 / 淸樂動?洋
채색 구름은 뭉게뭉게 떴다 / 彩雲浮??

한 나라 신작 3년인 임술년에 천제(天帝)가 태자를 보내어 부여왕의 옛도읍에 내려와 놀았는데 이름이 해모수(解慕漱)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오룡거(五龍車) 타고 따르는 사람 1백여 인은 모두 흰 고니를 탔다.
채색 구름은 위에 뜨고 음악 소리는 구름 속에서 울렸다.
웅심산(熊心山)에 머물렀다가 10여 일이 지나서 내려오는데 머리에는 오우관(烏羽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찼다.

옛날부터 천명을 받은 임금이 / 自古受命君
어느 것이 하늘에서 준 것이 아닌가 / 何是非天賜
대낮 푸른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 白日下靑冥
옛적부터 보지 못한 일이다 / 從昔所未視
아침에는 인간 세상에서 살고 / 朝居人世中
저녁에는 천궁으로 돌아간다 / 暮反天宮裏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물면 곧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천왕랑(天王郞)이라 일컬었다.

내 옛사람에게 들으니 / 吾聞於古人
하늘에서 땅까지의 거리가 / 蒼穹之去地
이억 만 팔천 / 二億萬八千
칠백 팔십 리란다 / 七百八十里
사다리로도 오르기 어렵고 / 梯棧?難升
날개로 날아도 쉽게 지친다 / 羽?飛易?
아침저녁 임의로 오르내리니 / 朝夕恣升降
이 이치 어째서 그러한가 / 此理復何爾
성 북쪽에 청하가 있으니 / 城北有靑河
청하(靑河)는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다.
하백의 세 딸이 아름다웠다 / 河伯三女美

맏은 유화(柳花)요 다음은 훤화(萱花)요 끝은 위화(葦花)이다.

압록강 물결 헤치고 나와 / 擘出鴨頭波
웅심 물가에서 놀았다 / 往遊熊心?
청하에서 나와서 웅심연(熊心淵)가에서 놀았다.
쟁그랑 딸랑 패옥이 울리고 / ?琅佩玉鳴
부드럽고 가냘픈 모습 아름다웠다 / 綽約顔花媚

자태가 곱고 아리따웠는데 여러 가지 패옥이 쟁그랑거리어 한고(漢皐)와 다름 없었다.

처음에는 한고 물가인가 의심하고 / 初疑漢皐濱
다시 낙수의 모래톱을 연상하였다 / 復想洛水沚
왕이 나가서 사냥하다 보고 / 王因出獵見
눈짓을 보내며 마음 두었다 / 目送頗留意
곱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함이 아니라 / 玆非悅紛華
참으로 뒤 이을 아들 낳기에 급함이었다 / 誠急生繼嗣

왕이 좌우에게,“얻어서 왕비를 삼으면 후사를 둘 수 있다.”하였다.

세 여자가 왕이 오는 것을 보고 / 三女見君來
물에 들어가 한참 동안 서로 피하였다 / 入水尋相避
장차 궁전을 지어 / 擬將作宮殿
함께 와서 노는 것 엿보려 하여 / 潛候同來?
말채찍으로 한번 땅을 그으니 / 馬?一?地
구리집이 홀연히 세워졌다 / 銅室?然峙
비단 자리를 눈부시게 깔아 놓고 / 錦席鋪絢明
금술잔에 맛있는 술 차려 놓았다 / 金?置淳旨
과연 스스로 돌아들어와서 / ??果自入
서로 마시고 이내 곧 취하였다 / 對酌還徑醉

그 여자들이 왕을 보자 곧 물로 들어갔다. 좌우가,
“대왕은 왜 궁전을 지어서 여자들이 방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못 나가게 문을 가로막지 않으십니까?”하였다.
왕이 그렇게 여겨 말채찍으로 땅에 긋자 구리집이 갑자기 이루어졌는데 장려(壯麗)하였다. 방 안에 세 자리를 베풀고
술상을 차려 놓았다. 그 여자들이 각각 그 자리에 앉아 서로 권하며 마셔 술이 크게 취하였다.

왕이 그때 나가 가로막으니 / 王時出橫遮
놀라 달아나다 미끄러져 자빠졌다 / 驚走僅顚?

왕이 세 여자가 크게 취할 것을 기다려 급히 나가 막으니 여자들이 놀라 달아나다가 맏딸 유화(柳花)가 왕에게 붙잡혔다.

맏딸이 유화인데 / 長女曰柳花
이 여자가 왕에게 붙잡혔다 / 是爲王所止
하백이 크게 노하여 / 河伯大怒嗔
사자를 시켜 급히 달려가서 / 遣使急且?
고하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 告云渠何人
감히 경솔하고 방자한 짓을 하는가 / 乃敢放輕肆
회보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입니다 / 報云天帝子
높은 문족과 서로 혼인하기 청합니다 / 高族請相累
하늘을 가리키자 용수레가 내려오니 / 指天降龍馭
그대로 깊은 해궁에 이르렀다 / 徑到海宮邃

하백(河伯)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고하기를,“너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내 딸을 잡아 두는가?”하였다.
왕이 회보하기를,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인데 지금 하백에게 구혼하고자 합니다.”하였다.
하백이 또 사자를 보내어 고하기를,“네가 만일 천제의 아들이고 내게 구혼할 생각이 있으면 마땅히 중매를 시켜 말할 것이지
지금 문득 내 딸을 잡아 두니 어찌 그리 실례가 심한가?”하였다. 왕이 부끄러워하며 하백을 뵈려 하였으나 궁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놓아 보내고자 하니 그 여자가 이미 왕과 정이 들어서 떠나려 하지 않으며 왕에게 권하기를,
“만일 용거(龍車)가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이를 수 있다.”하였다.
왕이 하늘을 가리켜 고하니, 조금 뒤에 오룡거(五龍車)가 공중에서 내려왔다.
왕이 여자와 함께 수레를 타니 풍운이 홀연히 일어나며 하백의 궁에 이르렀다.

하백이 왕에게 이르기를 / 河伯乃謂王
혼인은 큰 일이라 / 婚姻是大事
중매와 폐백의 법이 있거늘 / 媒贄有通法
어째서 방자한 짓을 하는가 / 胡奈得自恣

하백이 예를 갖추어 맞아 좌정한 뒤에 이르기를,
“혼인의 도는 천하의 공통된 법규인데 어찌하여 실례되는 일을 해서 내 가문을 욕되게 하는가?”하였다.

그대가 상제의 아들이라면 / 君是上帝胤
신통한 변화를 시험하여 보자 / 神變請可試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 속에 / 漣?碧波中
하백이 변화하여 잉어가 되니 / 河伯化作鯉
왕이 변화하여 수달이 되어 / 王尋變爲獺
몇 걸음 못 가서 곧 잡았다 / 立捕不待?
또다시 두 날개가 나서 / 又復生兩翼
꿩이 되어 훌쩍 날아가니 / 翩然化爲雉
왕이 또 신령한 매가 되어 / 王又化神鷹
쫓아가 치는 것이 어찌 그리 날쌘가 / 博擊何大?
저편이 사슴이 되어 달아나면 / 彼爲鹿而走
이편은 승냥이가 되어 쫓았다 / 我爲豺而?
하백은 신통한 재주 있음 알고 / 河伯知有神
술자리 벌이고 서로 기뻐하였다 / 置酒相燕喜
만취한 틈을 타서 가죽 수레에 싣고 / 伺醉載革輿
딸도 수레에 함께 태웠다 / 幷置女於?

수레의 옆을 기(?)라 한다.

그 뜻은 딸과 함께 / 意令與其女
천상에 오르게 하려 함이었다 / 天上同騰?
그 수레가 물 밖에 나오기 전에 / 其車未出水
술이 깨어 홀연히 놀라 일어나 / 酒醒忽驚起

하백의 술은 이레가 되어야 깬다.

여자의 황금비녀로 / 取女黃金釵
가죽 뚫고 구멍으로 나와서 / 刺革從竅出

출(出)은 협운(?韻)이다.

홀로 적소를 타고 올라서 / 獨乘赤?上
소식 없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寂寞不廻騎

하백이,“왕이 천제(天帝)의 아들이라면 무슨 신통하고 이상한 재주가 있는가?”하니, 왕이,“무엇이든지 시험하여 보소서.”하였다.
이에 하백이 뜰 앞의 물에서 잉어로 화하여 물결을 따라 노니니 왕이 수달로 화하여 잡았고,
하백이 또 사슴으로 화하여 달아나니 왕이 승냥이로 화하여 쫓았고, 하백이 꿩으로 화하니 왕이 매로 화하였다.
하백은 참으로 천제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예로 혼인을 이루고 왕이 딸을 데려갈 마음이 없을까 두려워하여 풍악을 베풀고 술을 내어
왕을 권하여 크게 취하자 딸과 함께 작은 가죽 수레에 넣어 용거(龍車)에 실으니 이는 하늘에 오르게 하려 함이었다.
그 수레가 미처 물에서 나오기 전에 왕이 술이 깨어 여자의 황금비녀로 가죽 수레를 뚫고 구멍으로 홀로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

하백이 그 딸을 책망하여 / 河伯責厥女
입술을 잡아당겨 석 자나 늘여 놓고 / 挽吻三尺?
우발수 속으로 추방하고는 / 乃貶優渤中
오직 비복 두 사람만 주었다 / 唯與婢僕二

하백이 그 딸에게 크게 노하여,“네가 내 훈계를 따르지 않아서 마침내 우리 가문을 욕되게 하였다.”하고,
좌우를 시켜 딸의 입을 옭아 잡아당기어 입술의 길이가 석 자나 되게 하고 노비 두 사람만을 주어 우발수 가운데로 추방하였다.
우발은 못 이름인데 지금 태백산(太白山) 남쪽에 있다.

어부가 물 속을 보니 / 漁師觀波中
이상한 짐승이 돌아다녔다 / 奇獸行??
이에 금와왕에게 고하여 / 乃告王金蛙
쇠그물을 깊숙이 던졌다 / 鐵網投??
돌에 앉은 여자를 끌어당겨 얻었는데 / 引得坐石女
얼굴 모양이 심히 무서웠다 / 姿貌甚堪畏
입술이 길어 말을 못하므로 / 唇長不能言
세 번 자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 三截乃啓齒

어사(漁師) 강력부추(强力扶鄒)가 고하기를,“근자에 어량(魚梁 물을 막아 고기를 잡는 장치) 속의 고기를 도둑질해 가는 것이 있는데
무슨 짐승인지 알 수 없습니다.”하였다. 왕이 어사를 시켜 그물로 끌어내니 그물이 찢어졌다.
다시 쇠그물을 만들어 당겨서 돌에 앉아 있는 여자를 얻었다.
그 여자는 입술이 길어 말을 못하므로 그 입술을 세 번 잘라내게 한 뒤에야 말을 하였다.

왕이 해모수의 왕비인 것을 알고 / 王知慕漱妃
이내 별궁에 두었다 / 仍以別宮置
해를 품고 주몽을 낳았으니 / 懷日生朱蒙
이해가 계해년이었다 / 是歲歲在癸
골상이 참으로 기이하고 / 骨表諒最奇
우는 소리가 또한 심히 컸다 / 啼聲亦甚偉
처음에 되만한 알을 낳으니 / 初生卵如升
보는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 觀者皆驚悸
왕이 상서롭지 못하다 / 王以爲不祥
이것이 어찌 사람의 종류인가 하고 / 此豈人之類
마구간 속에 두었더니 / 置之馬牧中
여러 말들이 모두 밟지 않고 / 群馬皆不履
깊은 산 속에 버렸더니 / 棄之深山中
온갖 짐승이 모두 옹위하였다 / 百獸皆擁衛

왕이 천제 아들의 비(妃)인 것을 알고 별궁(別宮)에 두었더니 그 여자의 품안에 해가 비치자 이어 임신하여 신작(神雀) 4년 계해년
여름 4월에 주몽(朱蒙)을 낳았는데 우는 소리가 매우 크고 골상이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처음 낳을 때에 좌편 겨드랑이로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五升]들이 만하였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사람이 새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하고, 사람을 시켜 마구간에 두었더니
여러 말들이 밟지 않고, 깊은 산에 버렸더니 모든 짐승이 호위하고 구름 끼고 음침한 날에도 알 위에 항상 햇빛이 있었다.
왕이 알을 도로 가져다가 어미에게 보내어 기르게 하였더니, 알이 마침내 갈라져서 한 사내 아이를 얻었는데 낳은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언어가 모두 정확하였다.

어미가 우선 받아서 기르니 / 母姑擧而養
한 달이 되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 經月言語始
스스로 말하되 파리가 눈을 빨아서 / 自言蠅?目
누워도 편안히 잘 수 없다 하였다 / 臥不能安睡
어머니가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 母爲作弓矢
그 활이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 其弓不虛?

어머니에게,“파리들이 눈을 빨아서 잘 수가 없으니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오”하였다.
그 어머니가 댓가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스스로 물레 위의 파리를 쏘는데 화살을 쏘는 족족 맞혔다.
부여(扶餘)에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들 한다.

나이가 점점 많아지매 / 年至漸長大
재능도 날로 갖추어졌다 / 才能日漸備
부여왕의 태자가 / 扶餘王太子
그 마음에 투기가 생겼다 / 其心生妬忌
말하기를 주몽이란 자는 / 乃言朱蒙者
반드시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 此必非常士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 若不早自圖
후환이 끝없으리라 하였다 / 其患誠未已

나이가 많아지자 재능이 다 갖추어졌다. 금와왕은 아들 일곱이 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며 사냥하였다.
왕의 아들과 따르는 사람 40여 인이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는데 주몽은 사슴을 퍽 많이 쏘아 잡았다.
왕자가 시기하여 주몽을 붙잡아 나무에 묶어 매고 사슴을 빼앗았는데, 주몽이 나무를 뽑아 버리고 갔다.

태자(太子) 대소(帶素)가 왕에게, “주몽이란 자는 신통하고 용맹한 장사여서 눈초리가 비상하니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가서 말을 기르게 하니 / 王令往牧馬
그 뜻을 시험하고자 함이었다 / 欲以試厥志
스스로 생각하니 천제의 손자가 / 自思天之孫
천하게 말 기르는 것 참으로 부끄러워 / ?牧良可恥
가슴을 어루만지며 항상 혼자 탄식하기를 / ?心常竊導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 吾生不如死
마음 같아서는 장차 남쪽 땅에 가서 / 意將往南土
나라도 세우고 성시도 세우고자 하나 / 立國立城市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 爲緣慈母在
이별이 참으로 쉽지 않구나 / 離別誠未易

왕이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 그 뜻을 시험하였다. 주몽이 마음으로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나는 천제의 손자인데 남을 위하여
말을 기르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남쪽 땅에 가서 나라를 세우려 하나 어머니가 계셔서 마음대로 못합니다.”하였다.

그 어머니 이 말 듣고 / 其母聞此言
흐르는 눈물 씻으며 / ?然?淸淚
너는 내 생각 하지 말라 / 汝幸勿爲念
나도 항상 마음 아프다 / 我亦常痛?
장사가 먼 길을 가려면 / 士之涉長途
반드시 준마가 있어야 한다며 / 須必憑??
아들을 데리고 마구간에 가서 / 相將往馬閑
곧 긴 채찍으로 말을 때리니 / 卽以長鞭?
여러 말은 모두 달아나는데 / 群馬皆突走
붉은 빛이 얼룩진 한 말이 있어 / 一馬?色斐
두 길 되는 난간을 뛰어 넘으니 / 跳過二丈欄
이것이 준마인 줄 비로소 깨달았다 / 始覺是駿驥

《통전(通典)》에 주몽이 타던 말은 모두 과하마(果下馬)라 하였다.

남 모르게 바늘을 혀에 꽂으니 / 潛以針刺舌
시고 아파 먹지 못하네 / 酸痛不受飼
며칠 못되어 형상이 심히 야위어 / 不日形甚?
나쁜 말과 다름없었다 / 却與駑?似
그뒤에 왕이 돌아보고 / 爾後王巡觀
바로 이 말을 주었다 / 予馬此卽是
얻고 나서 비로소 바늘을 뽑고 / 得之始抽針
밤낮으로 도로 먹였다 / 日夜屢加?

그 어머니가,“이것은 내가 밤낮으로 고심하던 일이다. 내가 들으니 장사가 먼길을 가려면 반드시 준마가 있어야 한다.
내가 말을 고를 수 있다.”하고, 드디어 목마장으로 가서 긴 채찍으로 어지럽게 때리니 여러 말이 모두 놀라 달아나는데
한 마리 붉은 말이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넘었다. 주몽은 이 말이 준마임을 알고 가만히 바늘을 혀 밑에 꽂아 놓았다.
그 말은 혀가 아파서 물과 풀을 먹지 못하여 심히 야위었다. 왕이 목마장을 순시하며 여러 말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서
인하여 야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이 이 말을 얻고 나서 그 바늘을 뽑고 도로 먹였다 한다.

가만히 세 어진 벗을 맺으니 / 暗結三賢友
그 사람들 모두 지혜가 많았다 / 其人共多智

오이(烏伊)ㆍ마리(摩離)ㆍ협보(陜父) 등 세 사람이었다.

남쪽으로 행하여 엄체수에 이르러 / 南行至淹滯
일명 개사수(蓋斯水)인데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

건너려 하여도 배가 없었다 / 欲渡無舟艤

건너려 하나 배는 없고 쫓는 군사가 곧 이를 것을 두려워하여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개연히 탄식하기를,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황천과 후토(后土)는 나 고자(孤子)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주소서.”하고, 말을 마치고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가 나와 다리를 이루어 주몽이 건넜는데
한참 뒤에 쫓는 군사가 이르렀다.

채찍을 잡고 저 하늘을 가리키며 / 秉策指彼蒼
개연히 긴 탄식을 발한다 / 慨然發長?
천제의 손자 하백의 외손이 / 天孫河伯甥
난을 피하여 이곳에 이르렀소 / 避難至於此
불쌍한 고자의 마음을 / 哀哀孤子心
황천 후토가 차마 버리시리까 / 天地其忍棄
활을 잡아 하수를 치니 / 操弓打河水
고기와 자라가 머리와 꼬리를 나란히 하여 / 魚鼈騈首尾
높직이 다리를 이루어 / 屹然成橋梯
비로소 건널 수 있었다 / 始乃得渡矣
조금 뒤에 쫓는 군사 이르러 / 俄爾追兵至
다리에 오르니 다리가 곧 무너졌다 / 上橋橋旋?

쫓아온 군사가 하수에 이르니 고기와 자라가 이룬 다리가 곧 허물어져 이미 다리에 오른 자는 모두 빠져 죽었다.

한 쌍 비둘기 보리 물고 날아 / 雙鳩含麥飛
신모의 사자가 되어 왔다 / 來作神母使

주몽이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너는 어미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하고 오곡 종자를 싸 주어 보내었다.
주몽이 살아서 이별하는 마음이 애절하여 보리 종자를 잊어버리고 왔다.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쉬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왔다.
주몽이,“아마도 신모(神母)께서 보리 종자를 보내신 것이리라.”하고, 활을 쏘아 한 화살에 모두 떨어뜨려 목구멍을 벌려
보리 종자를 얻고 나서 물을 뿜으니 비둘기가 다시 소생하여 날아갔다.

형세 좋은 땅에 왕도를 개설하니 / 形勝開王都
산천이 울창하고 높고 컸다 / 山川鬱??
스스로 띠자리 위에 앉아서 / 自坐??上
대강 군신의 위차를 정하였다 / 略定君臣位

왕이 스스로 띠자리 위에 앉아서 대강 임금과 신하의 위차를 정하였다.

애달프다 비류왕이여 / ?哉沸流王
어째서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 何奈不自揆
선인의 후예인 것만 굳이 자긍하고 / 苦矜仙人後
천제의 손자 존귀함을 알지 못하였나 / 未識帝孫貴
한갓 부용국으로 삼으려 하여 / 徒欲爲附庸
말하는 데 삼가거나 겁내지 않네 / 出語不愼?
그림 사슴의 배꼽도 맞히지 못하고 / 未中?鹿臍
옥가락지 깨는 것에 놀랐다 / 驚我倒玉指

비류왕 송양(松讓)이 나와 사냥하다가 왕의 용모가 비상함을 보고 이끌어 함께 앉아서,“바다 한쪽에 치우쳐 있어 일찍이 군자(君子)를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대는 어떠한 사람이며 어느 곳에서 왔는가?”하니,
왕이, “과인은 천제의 손자요 서국(西國)의 왕이다. 감히 묻노니 군왕은 누구의 후손인가?”하니,
송양이,“나는 선인(仙人)의 후손인데 여러 대 왕 노릇을 하였다. 지금 지방이 대단히 작아서 나누어 두 왕이 될 수 없고
그대는 나라를 만든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부속국이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왕이, “과인은 천제의 뒤를 이었지마는 지금 왕은 신(神)의 자손도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라 칭호하니,
만일 내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하였다.
송양은 왕이 여러 번 천제의 손자라 자칭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의심을 품어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여,
“왕과 활쏘기를 원하노라.”하고, 그린 사슴을 1백 보 안에 놓고 쏘았는데 그 화살이 사슴 배꼽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힘에 겨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玉指環]를 가져다가 1백 보 밖에 달아매고 쏘았는데 기왓장 부서지듯 깨지니
송양이 크게 놀랐다.

와서 고각이 변색한 것을 보고 / 來觀鼓角變
감히 내 기물이라 말하지 못하였다 / 不敢稱我器

왕이,“국가의 기업이 새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고각(鼓角)의 위의(威儀)가 없어서 비류(沸流)의 사자가 왕래함에 내가 왕의 예로
맞고 보내지 못하니 그 까닭으로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하였다.
시종하는 신하 부분노(扶芬奴)가 앞에 나와,“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의 북을 가져오겠습니다.”하였다.
왕이,“다른 나라의 감추어 둔 물건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려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준 물건이니 왜 가져오지 못하겠습니까? 대왕이 부여(扶餘)에서 곤욕을 당할 때에 누가 대왕이 여기에 이르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지금 대왕이 만 번 죽음을 당할 위태한 땅에서 몸을 빼쳐 나와 요좌(遼左)에 이름을 날리니
이것은 천제가 명령하여 하는 것이라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하였다.
이에 부분노 등 세 사람이 비류에 가서 북을 가져오니 비류왕이 사자를 보내어 고하였다.
왕이 비류에서 와서 고각을 볼까 두려워하여 빛깔을 오래된 것처럼 검게 만들어 놓으니 송양(松讓)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집 기둥이 묵은 것을 와서 보고 / 來觀屋柱故
말 못하고 도리어 부끄러워했다 / ?舌還自愧

송양이 도읍을 세운 선후(先後)를 따져 부용국(附庸國)을 삼고자 하니, 왕이 궁실을 지을 때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
천 년 묵은 것같이 했다. 송양이 와서 보고 마침내 감히 도읍을 세운 선후를 따지지 못하였다.

동명왕이 서쪽으로 순수할 때 / 東明西狩時
우연히 눈빛 고라니를 얻었다 큰 사슴을 고라니라 한다. / 偶獲雪色?
해원 위에 거꾸로 달아매고 / 倒懸蟹原上
감히 스스로 저주하기를 / 敢自呪而謂
하늘이 비류에 비를 내려 / 天不雨沸流
그 도성과 변방을 표몰시키지 않으면 / 漂沒其都鄙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 / 我固不汝放
너는 내 분함을 풀어다오 / 汝可助我?
사슴의 우는 소리 심히 슬퍼 / 鹿鳴聲甚哀
위로 천제의 귀에 사무쳤다 / 上徹天之耳
장마비가 이레를 퍼부어 / 霖雨注七日
주룩주룩 회수 사수를 넘쳐나듯 / ?若傾淮泗
송양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 松讓甚憂懼
흐름을 따라 부질없이 갈대 밧줄을 가로 뻗쳤다 / 沿流?橫葦
백성들이 다투어 와서 밧줄을 잡아당겨 / 士民競來攀
서로 쳐다보며 땀을 흘리었다 / 流汗相?
동명왕이 곧 채찍을 들어 / 東明卽以鞭
물을 그으니 곧 멈추었다 / ?水水停沸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 / 松讓擧國降
이 뒤로는 우리를 헐뜯지 못하였다 / 是後莫予?

서쪽을 순행하다가 사슴 한 마리를 얻었는데 해원에 거꾸로 달아매고 저주하기를,
“하늘이 만일 비를 내려 비류왕의 도읍을 표몰시키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
이 곤란을 면하려거든 네가 하늘에 호소하라.”하였다.
그 사슴이 슬피 울어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니 장마비가 이레를 퍼부어 송양의 도읍을 표몰시켰다,
송양왕이 갈대 밧줄로 흐르는 물을 횡단하고 오리 말을 타고 백성들은 모두 그 밧줄을 잡아당겼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긋자 물이 곧 줄어들었다.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한다.

검은 구름이 골령을 덮어 / 玄雲冪?嶺
산이 뻗쳐 연한 것이 보이지 않고 / 不見山??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들려 / 有人數千許
나무 베는 소리와 방불하였다 / ?木聲??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 王曰天爲我
그 터에 성을 쌓는 것이라 한다 / 築城於其趾
홀연히 운무가 흩어지니 / 忽然雲霧散
궁궐이 우뚝 솟았다 / 宮闕高嵬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하고 오직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토목(土木) 공사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왕이,“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하였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왕이 황천께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

왕위에 있은 지 십구 년 만에 / 在位十九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았다 / 升天不下?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채찍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 한다.

뜻이 크고 기이한 절개 있으니 / ??有奇節
원자의 이름은 유리이다 / 元子曰類利
칼을 얻어 부왕의 위를 이었고 / 得劍繼父位
동이 구멍 막아 남의 꾸지람을 그쳤다 / 塞盆止人?

유리가 어려서부터 기이한 기절이 있었다 한다. 소년 때에 참새 쏘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보고
쏘아서 뚫었다. 그 여자가 노하여 욕하기를,“아비도 없는 자식이 내 물동이를 쏘아 뚫었다.”하였다.
유리가 크게 부끄러워하여 진흙 탄환으로 쏘아서 동이 구멍을 막아 전과 같이 만들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유리가 나이 어리기 때문에 희롱 삼아 말하기를,“너는 일정한 아버지가 없다.”
하였다. 유리가 울며,“사람이 일정한 아버지가 없으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남을 보겠습니까?”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찌르려
하였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리며,“아까 한 말은 희롱 삼아 한 말이다. 너의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인데
부여의 신하되는 것을 원망하다가 도망하여 남쪽 땅에 가서 국가를 창건하였단다. 네가 가보겠느냐?“하였다.
대답하기를, “아버지는 임금이 되었는데 아들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내가 비록 재주 없으나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어머니가,“너의 아버지가 갈 때 말을 남기기를 ‘내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 소나무에 물건을 감추어 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찾아 얻는 자는 내 자식이다.’ 하였다.”했다. 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찾다가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다.
유리가 당(堂)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는데 그 기둥은 돌 위의 소나무이고 나무 모양이 일곱 모서리였다.
유리가 스스로 해득하기를,“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라는 것은 일곱 모서리이고, 돌 위 소나무라는 것은 기둥이다.”하고
일어나 가 보니 기둥 위에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에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얻고 크게 기뻐하였다.
전한(前漢) 홍가(鴻嘉) 4년 여름 4월에 고구려(高句麗)로 달아나서 칼 한 조각을 왕께 받들어 올렸다.
왕이 가지고 있는 부러진 칼 한 조각을 내어 합하니 피가 나면서 이어져 한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네가 실로 내 자식이라면 무슨 신성(神聖)함이 있느냐?”하니, 유리가 즉시 몸을 날리어 공중에 솟구쳐 창구멍으로
새어 드는 햇빛을 막아 기이한 신성을 보이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내 성품 본래 질박하여 / 我性本質木
기이하고 괴상한 것 좋아하지 않는다 / 性不喜奇詭
처음에 동명왕의 일을 보고 / 初看東明事
요술인가 귀신인가 의심하였다 / 疑幻又疑鬼
서서히 서로 간섭하여 보니 / 徐徐漸相涉
변화가 추측하여 의논하기 어렵다 / 變化難擬議
하물며 이것은 직필로 쓴 글이라 / 況是直筆文
한 글자도 헛된 글자가 없다 / 一字無虛字
신이하고도 신이하여 / 神哉又神哉
만세에 아름다운 일이다 / 萬世之所?
생각건대 창업하는 임금이 / 因思草創君
성신이 아니면 어찌 이루랴 / 非聖卽何以
유온이 큰 못에서 쉬다가 / 劉?息大澤
꿈꾸는 사이에 신을 만났다 / 遇神於夢寐
우뢰 번개에 천지가 캄캄하고 / 雷電塞晦暝
괴이하고 위대한 교룡이 서려 있었다 / 蛟龍盤怪傀
인하여 곧 임신이 되어 / 因之卽有娠
성신한 유계를 낳았다 / 乃生聖劉季
이것이 적제의 아들인데 / 是惟赤帝子
일어남에 특이한 복조가 많았다 / 其興多殊祚
세조 광무황제가 처음 태어날 때 / 世祖始生時
광명한 빛이 집 안에 가득하였다 / 滿室光炳?
절로 적복부에 응하여 / 自應赤伏符
황건적을 소탕하였다 / 掃除黃巾僞
자고로 제왕이 일어남에 / 自古帝王興
많은 징조와 상서가 있으나 / 徵瑞紛蔚蔚
끝 자손은 게으르고 거칠음이 많아 / 末嗣多怠荒
모두 선왕의 제사를 끊어뜨렸다 / 共絶先王祀
이제야 알겠다 수성하는 임금은 / 乃知守成君
신고한 땅에서 작게 삼갈 것을 경계하여 / 集蓼戒小毖
너그럽고 어짊으로 왕위를 지키고 / 守位以寬仁
예와 의로 백성을 교화하여 / 化民由禮義
길이길이 자손에게 전하여 / 永永傳子孫
오래도록 나라를 통치하였다 / 御國多年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