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2일 수요일

고려 - 최승로 오조정적평 시무23조


성종 원년(982)에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이 되었다. 그 때 왕이 신하의 진언을 요구하자 최승로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신은 시골에서 생장해 성품이 우매하고 학문이나 기예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태평한 세상을 만나 오래 동안 근시()의 직임을 외람되게 맡았고 여러 차례 특별한 영예를 입었습니다. 지금의 폐습을 바로잡을 뛰어난 정책은 부족하지만 마음에 간직한 일편단심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살펴보건대, 당나라 현종() 개원()6) 연간에 사신()으로 있던 오긍()은 『정관정요()』7)를 지어 현종에게 태종()의 선정을 본받도록 권고하려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시대의 상황이 서로 비슷하고 한 왕실인데다 정치가 훌륭하여[8)] 모범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살펴보니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고 왕통을 물려주신 것[9)]은 곧 개조()의 공이요, 여러 임금들이 왕위를 물려받아 위업을 계승한 것은 뒤 임금들의 덕입니다. 개조께서 나라를 세워 자손의 행복과 경사를 열어주신 반면, 뒤 임금들은 중흥과 침체를 거듭했으나 일면 부족함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정치에 치란이 있고 일에 선악이 있으며, 시작할 때와 같이 마무리를 잘하지 못해 위태롭고 어지러운 지경에 이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니,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개국한 이래로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두 저의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5대 조정에서 정치와 교화가 잘되었거나 잘못된 사적을 기록하여 본받을 만하고 경계할 만한 것을 조목별로 아뢰겠습니다.

삼가 살펴보니 우리 태조신성대왕()께서 왕위에 오르신 그 시기는 난세[10)]에 해당하였고 운수는 천년에 합치[11)]하였습니다. 처음에 내란을 평정하고 흉악한 무리를 정벌할 때, 하늘이 임시로 그 일을 맡을 군주를 내어 그의 손을 빌리었고, 그 뒤에 도참비기()의 예언에 따라 천명을 받고서 왕의 자리에 오르니 사람들이 태조의 덕망을 알고서 따르고 복종하였습니다. 곧 신라[12)]가 스스로 멸망하였고 고려[鹿]13)가 다시 일어나는 운을 타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곧 대궐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요하()와 패수(浿)14)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15)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16)를 통일하였으니, 공적은 더없이 높고 덕망은 한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란()은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하고17) 있으니 먼저 우호를 맺어야 하며, 저들 또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국교를 거절했던 것은 저들이 발해와 서로 연합했다가 갑자기 의심하면서 옛 동맹을 돌아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조는 이같이 무도한 나라와 국교를 맺을 수 없다고 여겨 그들이 바친 낙타를 모두 버리고 기르지 않았습니다. 그 심원한 계책으로 우환을 미연에 막고 위태롭기 전에 나라를 보존함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발해는 거란의 군사에게 격파되고 그 나라의 세자인 대광현()18) 등이 우리나라가 의리로 흥기하였으므로 남은 무리 수만 호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달려왔습니다. 태조는 이들을 더욱 가엾게 여기고, 영접하여 대우함이 매우 두터웠고, 성씨와 이름을 내려주기까지 하였으며, 그들을 종실의 적()에 붙이어서 자기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문무 참좌() 이하에게도 모두 벼슬과 품계를 넉넉하게 내려 주었습니다. 이렇듯 열심히 멸망한 나라를 보존해 주고 끊어진 제사를 이어가게 해 줌으로써,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복속하게 만든 것입니다.

후백제()19)의 견훤은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며 변란을 좋아하여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못살게 했습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쉴 겨를도 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죄를 다스리어 마침내 망해가는 신라를 바로잡았으니,20) 그가 옛 임금을 잊지 않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안정시킨 것이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신라 말기부터 우리나라 건국 초기까지 서북의 변방 백성들은 늘 여진() 오랑캐21)의 기병이 침구해 노략질하는 통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태조는 마음속으로 용단을 내리고 한 사람의 뛰어난 장수22)를 보내어 그 곳을 지키게 하니,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도 도리어 미개인들이 귀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국경 밖이 조용해지고 변방에 근심이 없었으니 태조께서 사람을 알아보고 임무를 적절히 맡기며,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고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을 능숙하게 다룸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운수가 다하여 스스로 귀화하기를 간청23)했으나, 태조는 두 세 번 사양하다가 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동쪽으로는 명주( :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로부터 흥례부( : 지금의 울산광역시)에 이르기까지 1백 십여 성들이 다들 태조의 인후함을 흠모해 때 맞춰 와서 복종했습니다. 태조께서 예로써 사양하여 사람들이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이 또한 이러했던 것입니다.

다만 남쪽으로 후백제를 평정하면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했습니다. 군사를 동원함이 전후 수차례였으나 태조의 깃발과 군마 앞에서 어떤 자는 전쟁터에 나서자마자 바로 투항했고 어떤 자는 풍채를 우러러 보다 두려워서 투항했습니다. 비록 창과 칼을 마주하고 싸워도 살상하지 않으려 했으니, 이는 어진 사람에게 적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견훤은 죄악을 쌓은 지 수십 년 만에 반역한 자식에게 갇혔다가 우리나라로 도망해 와서 반역한 자식24)들을 무력을 빌려 토벌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후한 예로 맞아들였고, 그가 죽자 부의를 넉넉하게 내려주었습니다. 내세와 현세에 두루 걸친 도덕과 삶과 죽음에 두루 통한 의리가 이와 같았습니다.

후백제를 평정하고 태조가 도성에 들어가서 궁핍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어 구휼하였고, 위로와 회유를 두텁게 더하였으며 여러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백성의 재물을 털끝만큼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 남북이 오래 동안 분열되고 신구()25)가 구별되었으나 태조가 이를 한결같이 어루만지어 시종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태조의 도량이 크고 너그럽고 관대함26)이 또한 이러했습니다.

통일을 이룩한 이래로 여덟 해 동안 정사에 부지런하였고, 예로써 큰 나라를 섬기고 도의로써 이웃 나라와 사귀었으며, 편안할 때 안일하지 않았고 아래 사람을 접할 때 공경했습니다. 도덕을 소중하게 여기고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했습니다. 궁실()을 낮게 지어 겨우 비바람을 가리고자 했으며, 거친 옷을 입어 단지 추위와 더위만을 막았습니다. 어진 이를 좋아했고 착한 일을 즐겼으며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 바르고 겸한 마음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민간에서 생장하여 어렵고 힘든 일을 두루 겪었으므로 사람들의 진실과 거짓을 모두 깨닫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온갖 일들의 안녕과 위기를 앞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과 벌이 적절하게 시행되었고, 진실과 거짓이 명확히 구분되었으니,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방법을 알고, 제왕이 행해야 할 것을 체득함이 또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 그들의 재주를 잃게 하지 않았으니, 아랫사람을 거느릴 때는 반드시 그의 능력을 알아보았고, 어진 이를 임용할 때는 믿는 마음을 변치 않았으며, 사악한 사람을 제거할 때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불교를 높이 받들고 유교를 소중하게 여겨 임금으로서의 미덕이 이로써 갖추어지게 되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좋은 계책이 본받을 만했습니다. 다만 창업의 초기로 태평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아 종묘사직이 아직 굳게 안정되지 못했고, 예악 문물에 부족한 것이 많으며, 백관의 품계와 격식, 그리고 내외의 규정과 의례가 미처 갖춰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조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27) 이는 나라 사람의 불행이며, 믿기 어려운 천도()로 참으로 애석하다 할 것입니다.

혜종은 오랫동안 태자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감국()과 무군()28)의 직무를 처리하였으며, 스승을 존경하여 예우하고 빈객()과 관료들을 잘 접견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명성이 조야에 알려져 처음 즉위했을 때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정종의 형제가 반역의 뜻을 가졌다고 참소29)하였습니다. 그러나 혜종은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으며 또한 물어보지도 않은 채, 은혜로 대우함이 더욱 더하여 그를 처음과 같이 대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 분의 큰 도량에 감복하였습니다.

얼마 뒤 덕정()을 닦지 않고 지나치게 자신의 목숨을 아껴, 곁에 항상 무장한 군사를 뒤따르게 하니, 이는 대개 사람을 의심함이 너무 심하여 군주의 체통을 크게 잃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상()이 장사들에게 치우쳐 혜택이 고르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의 안팎에서 사람들의 원망과 탄식이 크게 일어 인심을 잃었습니다. 또한 즉위한 다음 해(944)에 곧 불치의 병을 얻어 오랜 세월을 병석에서 지내셨습니다. 이 때 조정의 신하로 어진 사람은 그 앞에 가까이 가지 못했고 향리()의 소인()30)들이 항상 침실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병이 더욱 위독해질수록 노여움이 날로 더해서 3년 동안 백성들은 그의 덕을 입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혜종이 돌아가시는 날31)에야 겨우 횡액을 면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정종은 태자로 계실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혜종이 병석에 누워 오래 동안 회복되지 않자 재신() 왕규() 등이 몰래 모의하여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이 이를 먼저 알아차리고 은밀히 서도(西)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군32)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대비했습니다. 내란이 일어나려 하자 호위하는 군사가 많이 도착했으므로 간악한 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흉악한 무리들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는 비록 천명에 따랐다고는 하나 사람의 계책도 있었으니 어찌 뛰어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정종으로부터 지금까지 38년 간 왕위33)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

정종은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했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였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참()을 그릇되게 믿게 되자 도읍을 옮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굳세어 고집을 굽히지 아니했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도읍34)을 옮기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광종은 뛰어난 용모와 특출하게 영리한 자질로 태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종의 유언을 받고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아[35)] 보위를 이었습니다[36)]. 아래 사람을 접하는데 예가 있었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데 관찰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종친과 귀족이라고 사정을 두지 않았고, 항상 세력이 강한 자들을 눌렀습니다. 소원하고 천한 사람이라고 버리지 않았고, 홀아비 및 과부 등 불쌍한 이들에게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그가 즉위한 해로부터 8년간 정치와 교화가 맑고 공평하였으며 형벌과 상이 지나치지 않았습니다.37)

쌍기()를 등용한 뒤로부터 문사()38)들을 존중하여 대접이 지나치게 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재능이 없는 사람[]39)이 부당하게 등용되고, 순서를 지키지 않고 별안간 승진하여 채 일 년이 되지 않아서 재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저녁마다 사람을 불러 접견하고, 어떤 때는 날마다 접견하여 의견을 들었습니다[40)]. 이런 일을 기쁘게 생각하고 정사를 게을리하여 나라의 중요한 일은 막혀서 통하지 않고 마시고 먹는 잔치는 이어져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남북용인()41)이 다투어 의탁하길 청하는데 지혜와 재능을 논하지 않고 모두 특별한 은혜와 예절로써 대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젊은 신진들[42)]은 앞을 다투어 나아가고 오래된 신하43)들은 점점 쇠락했습니다.

비록 중화의 교화는 소중하게 여겼지만 중화의 법식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중화의 선비는 예의로 대우했지만 중화의 현명한 인재는 쓰지 못했습니다. 백성에게서는 피와 땀이 서린 재물을 짜내고, 사방으로부터는 실속 없는 칭찬만을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시는 정치에 힘쓰지 않고 빈료()만을 접견하니, 시기만 날마다 깊어 가고 군신 간에 정사에 대한 의논의 길44)은 날로 막혀서 정치적 득실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불사()45)에 너무 의지하고 법문을 지나치게 소중히 여겨 정기적으로 행하는 재()가 이미 많이 베풀어졌는데도, 특별히 발원하는 분향()과 수법()이 적지 않았습니다. 오직 복과 장수를 구하는데 전심하고 기도만을 일삼아 한정된 재력을 탕진하면서 무한한 인연을 만들려 하였습니다. 이는 제왕()의 지위를 스스로 낮추고 사소한 선행만을 즐긴 것입니다. 또한 연회와 놀이에 드나들면서 사치가 끝이 없었습니다. 당장 눈앞에 사고가 없는 것을 불교의 힘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고 생각하여 잘못된 행위를 뉘우쳐 고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대궐은 반드시 규정된 국가의 법제를 초월하여 지었고, 의복과 음식은 모름지기 곱고 얇은 비단을 사용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 사치스럽게 하였습니다. 토목 사업46)은 농번기를 피하지 않았고, 기이한 물건의 제작은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평상시 일 년의 경비를 대략 계산하면 태조가 십년 동안 쓴 비용이 될 만 했습니다.

또 말년에는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만약 광종이 항상 삼가하고 검소한 뜻을 마음에 새겨 비용을 절감하며 처음과 같이 정사에 부지런히 힘썼더라면, 어찌 그의 복록과 수명이 길지 못하여47) 명이 겨우 쉰에 그쳤겠습니까? 그가 마무리를 잘하지 못했던 일은 참으로 애석합니다. 더구나 경신년부터 을해()년(광종 26, 975)까지 16년간 간악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앞을 다투어 진출하면서 참소하여 헐뜯음이 크게 일어나 군자는 몸을 둘 곳이 없었고 소인만 뜻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자식이 부모를 거스르고 종이 그의 주인을 비난 공격하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마음을 달리하고 임금과 신하의 몸이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래된 신하와 경험 많은 장수[宿48)]들은 차례로 죽임을 당했고 가까운 친인척들은 모두 죽어갔습니다.

더욱이 혜종이 형제를 온전히 할 수 있던 것과 정종이 나라를 잘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 은혜와 의리가 두텁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 두 임금의 조정에는 오직 외아들만이 있었는데, 광종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지 않았으니, 그들의 덕을 갚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곧 다시 그들의 원한을 깊게 맺게 한 것입니다. 또 말년에는 자기의 외아들에 대해서까지 의혹과 시기를 품었습니다. 그래서 경종이 태자로 있으면서 늘 편안하게 있지 못하다가 요행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아아! 어찌하여 처음에 착해서 명망을 얻었다가 뒤에는 착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깊이 통탄할 일입니다.

경종은 깊은 궁궐 속에서 태어나 부녀자의 손49)에서 자라난 관계로 궁궐 문 밖의 일은 일찍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단지 천성이 총명하여 광종의 말년에도 화를 면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즉위하신 뒤에 참소하고 중상한 해묵은 문서들을 불사르고 여러 해 옥에 갇혔던 죄수들을 석방하니 원한과 울분이 모두 없어지고 조정과 민간에서 경사라 일컬었습니다. 다만 정치하는 법도를 알지 못해 권호()50)에게 오로지 정권을 맡겼기 때문에 피해가 종친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재앙의 징조51)가 먼저 나타나 뒤에 비록 깨닫고 뉘우쳤으나 책임이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간사한 것과 정직한 것이 분별되지 않고 상을 내리는 것과 죄를 주는 것이 한결같지 않아 올바른 정치를 하는 데 이르지 못했습니다. 다시 정사를 게을리 하였으며 드디어 여색에 빠져 향악() 연주를 즐겨 관람하다가 뒤에는 장기와 바둑을 종일 두어도 싫증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곁에는 오직 중관()52)·내수()53)들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군자의 말은 들어갈 곳이 없고 소인의 말만 때때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도 일찍이 좋은 명성이 있었으나 말년에는 어진 덕행이 없었으니 이른바 ‘시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끝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54)는 것입니다. 충신의사로서 누군들 이를 원통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친히 보고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경종에게도 칭송할만한 미덕이 있었습니다. 처음 병이 나서 아직 위독하지 않았을 때 침실에서 전하를 접견하시고 손을 잡고 말씀하시면서 나라를 부탁했습니다. 이는 사직의 복일뿐만 아니라 인민의 행복이었습니다. 생각건대 혜종·경종 두 분은 모두 태자로서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사람들이 다른 뜻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형제 사이에 왕위를 계승할 경우에 분명한 부탁이 없으면 반드시 다툼의 단서가 일어났습니다. 혜종은 2년 동안 병으로 누워 있다가 돌아가셨는데 흥화낭군()55)이란 아들을 두고 있었으나 나이 어리고 여러 아우들에게 뒷일을 충분히 부탁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종이 스스로 여러 신하들로부터 추대를 받아 왕위를 이었습니다. 정종은 임종하면서도 일찍이 광종에게 왕위를 전하여 주어 왕실과 사직을 안정시켰습니다. 때문에 정종과 경종 두 임금의 남긴 분부는 현명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살피건대 혜종·정종·광종 세 임금이 서로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는 모든 일이 안정되지 못한 시기여서 개경·서경의 문무 관리들의 절반 이상이 이미 살상되었습니다. 더구나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소가 일어나서 형벌에 연루된 이들은 대부분 죄가 없었고, 역대로 공훈을 세운 신하와 경험 많은 노장들이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경종이 왕위에 오를 때 옛 신하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은 40여 명뿐이었습니다. 그 때에도 피해를 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모두 후진과 남을 참소한 무리들[56)]이므로 진실로 애석하지 않습니다.

단지 천안낭군()과 진주낭군()은 본래 황실의 자손이어서 광종도 오히려 몸소 관용을 베풀고 마침내 이들을 법으로 처리하지 않았으므로 경종의 재위 기간에 이르러 충분히 왕실의 울타리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권세를 잡은 신하의 피해를 입고 죽어서 지하의 원통한 넋이 되었으니, 어찌 종실[]57)의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돌아가신 선왕께서 장수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불행에서 기인함이 많으니 이런 일은 후세에 경계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상성()의 덕을 가지시고 중흥의 시기를 만났으며, 선대의 왕이 왕위를 겸손하게 물려 준 은혜에 기인하여 역대 왕들의 크나 큰 왕업58)을 계승하시니 하나의 생물도 그의 삶을 즐기지 않은 것이 없었고 한 사람도 그의 거처를 얻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안팎이 함께 기뻐하고 사람과 신이 서로 경하하니, 소위 하늘이 내려 주고 사람들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태조의 유풍을 잘 준수하신다면, 당나라 현종이 문황( : 당나라 태종)을 추모한 옛 일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또 네 조정의 근대 사적에서 본받을 만한 것은 본받고 버릴 것은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곧 혜종께서는 골육을 보전한 공적이 있으니 형제간에 우애의 의리를 가졌다고 할 수 있고, 정종께서는 반란의 싹을 미리 알아서 내란59)을 잘 진정시켜 다시금 왕실과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 왕위를 전수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였으니 지모가 밝았다고 할 수 있으며, 광종의 초기 여덟 해 동안 정치는 3대에 견줄 수 있고 조정의 의례와 제도도 자못 볼 만한 것이 있으니 소위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이 고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종께서는 돌아가신 국왕의 재위 기간에 원통하게 옥살이한 죄수 수천 명을 석방하고 여러 해 동안 참소하여 헐뜯은 문서를 불태우니 소위 너그러운 마음과 인자한 품성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네 조정이 정치한 사적이 대략 이와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잘한 사적을 받아들여 이를 행하고 잘하지 못한 사적을 보고 경계하며, 긴급하지 않은 일을 없애 버리고 이롭지 않은 노역을 폐지하시어 오직 임금은 위에서 평안하시고 백성은 아래에서 기뻐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처음을 잘하는 마음으로써 마침을 잘하는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날마다 삼가 비록 쉴 수 있는 날에도 쉬지 말며, 비록 군주가 되었더라도 스스로 존대하지 말며, 재능과 미덕을 풍부히 가졌더라도 스스로 교만하거나 뽐내지 말고 오직 자기를 공손히 하는 마음을 돈독히 하며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을 끊지 않으시면 복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올 것이고, 재앙은 기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멸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하의 수명이 어찌 만년이나 되지 않겠으며, 왕업이 어찌 백세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저는 비록 어리석으나 외람되이 국가의 요직에 있으면서 이미 아뢸 것이 마음에 있고 또 회피할 길이 없으므로 삼가 하잘 것 없는 소견을 기록하니, 시무책 28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를 모두 별지로 첨부하여 올립니다.

() 우리나라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래 마흔 일곱 해가 지났으나 병사들이 아직 편안한 잠을 자지 못하고, 군량의 소모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서북쪽이 오랑캐[]60)와 이웃하여 경비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러한 일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대체로 마헐탄()61)을 경계로 삼자는 것은 태조의 뜻이며, 압록강가의 석성()을 경계로 삼자는 것은 대조()62)가 결정한 것입니다. 장차 이 두 곳 중에 전하께서 마음속으로 판단하여 요충지를 가려서 강역을 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토착인 가운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 곳의 경비에 종사케 하고, 그 가운데 두 세 명의 편장을 뽑아서 이들을 도맡아 다스리게 하면 경군()들은 교대로 경비하는 고생을 면할 수 있으며, 말먹이와 군량을 급히 운반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덜 것입니다.

() 제가 듣건대, 성상께서는 공덕재()63)를 베풀기 위하여 때로는 친히 맷돌에 차를 갈기도 하고 때로는 보리를 찧으신다고 하시니, 저는 전하께서 친히 근로하시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폐단은 광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는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현혹되어 자신의 죄업을 없애고자 하여, 백성이 피와 땀을 흘려 얻은 재물을 빼앗아 불사()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때로는 비로자나참회법()64)을 베풀기도 하고, 또 구정()65)에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귀법사()66)에서 무차회()·수륙회()67)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에게 재를 올리는 날68)에는 반드시 걸식하는 승려69)들에게 음식을 공양하였고, 때로는 내도량()70)의 떡과 과일을 걸인들에게 내주었습니다. 또 신지()와 혈구(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및 마리산(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등지의 물고기 잡는 곳을 방생하는 장소로 삼아 한 해에 네 번 사자를 보내어 그 지방의 사원에 나아가 불경()을 강설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살생을 금지하여 주방의 고기반찬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게 짐승을 죽이지 말고 시장에서 사서 바치게 하였습니다. 대소의 신민()에게 모두 참회하도록 하여 쌀·잡곡·땔나무·숯·건초·콩을 어깨에 메거나 등에 지고서 서울과 지방의 길가는 사람에 베풀게 한 것이 이루어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벌써 남을 헐뜯는 말을 믿어 사람을 초개와 같이 여겨 베어 죽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항상 백성이 피와 땀을 흘려 얻은 재물을 다 짜내어 재를 올리는 재원으로 공양하였습니다.71) 이때에 자식이 부모에게 등을 돌리고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며, 여러 범죄자들 중에 모습만 바꾸어 승려가 된 자 및 떠돌아다니면서 빌어먹는 무리들이 진짜 승려들과 함께 섞여 재 올리는 곳으로 오는 자가 많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72)

지금 전하께서 왕위에 있으면서 실행하신 일들이 저와는 같지 않으나, 다만 이런 몇 가지 일들은 전하의 몸을 괴롭게 할 뿐이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군왕의 체통을 바르게 하여 이득이 없는 일을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 우리 조정의 임금을 호위하는 군졸들은 태조시대에는 궁성을 숙위(宿)하는 일만 맡았을 뿐이어서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광종은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장수와 재상들에게 체벌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스스로 의심을 품고 군사의 수를 더욱 늘렸습니다. 주군()에서 풍채 좋은 사람73)을 뽑아 대궐 안에 들여 시위하게 했고, 모두 궁궐의 주방에서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의논은 번잡하고 이로울 것이 없다고들 했습니다. 경종 때에 와서 비록 줄였다고는 하나 지금도 여전히 그 수가 많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태조의 법을 준수하시어 날래고 용감한 사람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그만두게 하여 돌려보내면 사람들 사이에는 원망이 없을 것이고, 나라에는 재물이 비축될 것입니다.

() 전하께서는 장·술·메주·국을 길가는 사람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제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광종을 본받아 죄업을 없애고 널리 베풀어 인연을 맺는 뜻을 본받고자 하시지만 이것은 이른바 작은 혜택으로는 널리 미치지 못한다[74)]는 것입니다. 만약 상벌을 명확히 하여 악한 것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한다면 복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일은 임금이 정치하는 요체가 아니니 이를 철회하길 바랍니다.

() 우리 태조께서는 큰 나라를 섬기는 일에 마음을 두셨으나, 몇 해에 한 번씩 사신을 보내어 교빙의 의례를 시행할 따름이었습니다. 지금은 사신을 보낼 뿐만 아니라 무역 때문에 오가는 사신이 번다하니 중국에서 천하게 여길까 염려됩니다. 또 왕래하다가 배가 침몰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교빙하는 사신에게 무역을75)겸행하게 하고, 기타 때 아닌 매매는 모두 금지하여 못하게 하십시오.

() 모든 불보()76)의 돈과 곡식은 여러 사원의 승려들이 각기 주·군에 사람을 보내어 그것을 관리하게 하고 해마다 이자를 받아 백성을 괴롭히고 소란스럽게 합니다. 청컨대 이를 모두 금지하고 그 돈과 곡식을 사원의 전장()으로 옮겨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주전()77) 중에 전정()을 가진 자는 그것을 거두어 들여 사원의 장()과 소()78)에 소속시킨다면 백성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 줄어들 것입니다.

() 임금이 백성을 다스릴 때 집집마다 가서 날마다 그들을 살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어 가서 백성의 이해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조인 태조께서도 통일한 뒤에 외관()79)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개 초창기이기 때문에 일이 번잡하여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제가 살펴보건대, 시골 토호들이 늘 공무80)를 빙자하여 백성들을 침해하여 포악하게 굴므로 백성들이 명령을 견뎌내지 못하니, 청컨대 외관을 두기를 바랍니다. 비록 일시에 모두 다 보낼 수 없을지라도 우선 10여개 주·현()을 합하여 한 명의 외관을 배치하고 그 아래 각기 두 세명의 관원을 두어서 백성을 어루만지며 보살피는 일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 제가 살피건대, 성상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굴산()81)의 승려인 여철()82)을 맞이하여 대궐로 불러 들였습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여철이 과연 사람들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사는 곳의 물과 흙도 전하의 소유이고 아침저녁으로 먹는 음식도 전하께서 내려주신 것이오니,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늘 축원을 일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번거롭게 대궐로 맞아들인 뒤에야 복을 베풀어 주겠습니까?

이전에 선회()83)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요역을 피하려고 출가하여 산에 살았습니다. 광종께서는 그를 극진하게 공경하고 예의를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선회가 길가에서 갑자기 죽어서 그의 시신이 길에 뒹굴었습니다. 그 같은 평범한 승려는 자기 자신도 화를 당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겨를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여철을 산으로 돌려보내시어 선회와 같은 비난을 받지 않게 하십시오.

() 신라 때 공경·백료·서인의 의복·신발·버선에는 각기 품등의 색깔이 있었습니다. 공경·백료는 조회 때 나갈 때는 공란()84)을 입고 천집(穿)85)을 갖추었으나, 조회에서 물러나올 때면 편리하게 옷을 입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무늬 있는 옷을 입을 수 없게 했던 것은 귀천을 나누고 존비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공란은 비록 우리나라에서 난 것이 아니라도 백관들이 스스로 구해 썼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태조 이래로 귀천을 논하지 않고 임의로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관직이 높아도 집이 가난하면 공란을 갖출 수 없고, 관직이 없어도 집이 부유하면 화려한 비단 의복을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물건은 좋은 것이 적고 조잡한 것이 많습니다. 무늬가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난 것이 아닌데도 사람마다 입을 수 있으니, 다른 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 백관의 예복이 법식대로 되지 않아서 수치를 당할까 염려스럽습니다.

바라옵건대 관료들에게 조회에서는 한결같이 중국과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공란과 천집을 갖추도록 하고, 일을 보고할 때는 버선신·명주신·가죽신을 신도록 하며, 서인들은 화려한 문양이 있는 깁과 주름이 잡힌 고운 비단을 입을 수 없게 하고 다만 굵은 명주만 입을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 제가 듣건대 승인()들이 군현을 오고 가면서 관·역에 유숙하고 향리와 백성들을 매질하여 그들의 영접과 물건 공급이 더디다고 꾸짖는데도, 향리와 백성들은 그들이 정말 왕명에 따라 출장을 나왔는지 의문이 들어도 두려운 나머지 감히 말하지 못하니, 폐단이 더할 수 없이 큽니다. 지금부터 승도()들이 관·역에 유숙하는 것을 금지시켜 그 폐단을 제거하소서.

() 중국의 제도는 준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습속은 각기 그 지역의 특성을 따르는 것이므로 모두 바꾸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악()·시서()의 가르침과 군신·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모범으로 삼아서 비루한 습속을 고치도록 하고, 그 나머지 거마와 의복 제도는 토착적인 풍속을 따를 수 있게 하여 사치와 검약을 적절히 할 것이고, 굳이 중국과 같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 여러 섬에 사는 사람들은 그 조상의 죄 때문에 바다 가운데서 생장하고 있으나, 토지에서는 먹을 것이 나지 않아 생활이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광록시(祿)86)에서 시도 때도 없이 물품을 거두어들이므로 날로 곤궁하게 되었습니다. 주·군의 사례에 따라 그들의 공역을 공평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봄에 연등회()87)를 거행하고 겨울에 팔관회()88)를 개최하느라 사람들을 징발해 각종 노역이 대단히 번거로우니, 원컨대 이를 대폭 줄여 백성의 수고를 덜어 주십시오. 또 갖가지 우인()을 만드느라 그 비용이 매우 많이 드는데도 한번 의례에 사용한 뒤 부수어 버리니 이는 쓸모없는 일입니다. 또한 우인은 상례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서조(西)의 사신이 와서 이것을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간 일도 있으니, 바라건대 지금부터는 이것을 사용하지 말게 하십시오.

() 『주역』에,89) ‘성인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천하가 화평해진다.’고 하였고, 『논어』에,90) ‘하는 일이 없이 다스리는 사람은 아마도 순임금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했는가? 자신을 바르게 하여 조정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고 했습니다. 성인이 하늘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순수하고 한결같은 덕과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마음을 겸손하게 가지며 늘 삼가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지녀 신하를 예의로 대우하시면, 누가 마음과 힘을 다해 나와서는 좋은 계책을 아뢰고 물러가서는 국정을 바로잡아 도울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왕이 신하를 예의로써 부리면 신하는 왕을 충성으로써 섬긴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하루하루를 삼가하여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신하를 대할 때 공손하며, 혹 죄지은 사람이 있어도 그 경중()을 법대로 논의하시면, 태평의 위업을 곧 기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태조께서는 궁내에 소속된 노비91)가 궁궐에서 공역할 때를 제외하고는 밖으로 나가 교외에 살면서 토지92)를 갈아 세를 바치게 하였습니다.93) 그러나 광종 때에 이르러 불사()를 많이 일으켜 부역이 날로 많아지니 밖에 살던 노비까지 불러들여 부역에 충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궁()의 비용94)으로는 경비 지급이 충분하지 못하여 창고의 쌀까지도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폐단이 전하의 시대에도 아직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또 궁궐 내에서 기르는 말의 수가 많아 비용이 매우 많이 드는 관계로 백성들이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국경에 환란이 있게 되면 군량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태조의 제도에 의거하여 궁궐 안의 노비와 마구간에 있는 말의 수를 적절히 제한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내보내십시오.

() 세속에서는 선을 베푼다는 명목으로 각기 소원에 따라 사원을 지으니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또 중앙과 지방의 승려들도 자기가 거주할 곳을 마련하고자 다투어 공사를 행하면서 주군의 장리()95)들에게 백성을 징발하여 부역시킬 것을 권장합니다. 이로 인해 그러한 사역()이 공역보다 급하여 백성들이 이를 매우 괴롭게 여깁니다. 바라건대 엄중하게 이를 금지하여96)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시기 바랍니다.

() 『예기』에, ‘천자의 마루높이는 아홉 척이요, 제후의 마루높이는 일곱 척이다.’고 하였으니, 나름대로 정해진 제도가 있습니다. 근래에는 사람들이 지위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단지 재력만 있으면 모두 집 짓는 일을 먼저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주·군·현 및 정()97)·역·진도()98)의 세력가들이 다투어 큰 집을 지어 제도를 위반하게 되니, 이는 다만 한 집의 힘을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바라건대 예관()에게 명을 내려 지위와 신분의 귀천에 따라 가옥의 제도를 적절히 규정해 중앙과 지방에서 이를 준수하게 하고, 이미 지어진 가옥 중에 규정을 위반한 것은 헐어버리게 하여 장래를 경계하도록 해야겠습니다.

() 불경을 베끼고99) 불상을 만드는 일은 단지 오래도록 전하려는 것일 뿐인데 무엇 하러 진귀한 보배로 장식을 하여 도적들의 마음을 자극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예전에는 불경은 모두 누런 종이를 사용하였고 전단목()으로 축을 만들었으며, 그 초상()은 금·은·동·철을 쓰지 않고 돌·흙·나무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훔치거나 훼손시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라 말 불경과 불상은 모두 금·은을 사용하여 사치의 정도가 지나쳤으므로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장사치들은 불상을 훔치거나 부수어 서로 매매함으로써 생계를 삼았는데 최근까지도 그 관습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이런 일을 엄하게 금지시켜서 그 폐단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 옛날 진()나라에 덕이 쇠하자 난()·극()·서()·원()·호()·속()·경()·백() 등의 귀족 성씨100)가 강등되어 천민에 예속되었습니다. 우리 삼한공신()101)의 자손들은 매번102)내린 교지마다 반드시 포상하고 등용한다고 하였으나, 아직 벼슬을 받은 사람 없이 천민에 섞여있으니, 신진 관료들이 업신여기는 행동을 제멋대로 하여 원망과 탄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광종 말년에는 조정의 신하를 죽이고 쫓아내는 바람에 훈구세가 자손이 제대로 가문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여러 차례 내리신 은혜롭고 너그러운 교지에 의거하여 그 공신의 등급에 따라 자손을 등용하십시오. 또한 경자년(태조 23년, 940)에 전과( : 역분전)를 받은 사람과 삼한() 통일 후에 벼슬살이한 사람에게도 역시 그 공을 참작해 관계와 관직을 준다면 원통하게 쓴 누명을 풀 수 있어 재해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 불교를 존숭하여 믿는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제왕()·사대부·백성들이 공덕을 닦는 일은 실제로 이와 다릅니다. 서민의 경우 수고하는 것은 자신의 힘이며 소비하는 것도 자기의 재물이므로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왕의 경우에는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소비하게 됩니다. 옛날에 양나라 무제()는 존귀한 천자로서 필부의 선덕을 닦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 여겼던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왕들은 이러한 이치를 깊이 고려하고 일마다 모두 중용()을 참작하여 폐단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게 했습니다.

듣건대, 사람의 화복과 귀천은 모두 태어나면서 받는다고 하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물며 불교를 믿는 것은 내세의 인과()만 심을 뿐이며 현세에서 받는 결과[103)]에 이익이 적으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여기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불교·유교·도교의 3교는 각기 중요롭게 여기는 바가 있으니, 그것을 섞어 하나로 묶을 수 없습니다. 불교를 믿는 것은 자신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입니다. 자신을 닦는 일은 내세를 위한 바탕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가깝고 내세는 지극히 머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은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치우침이 없이 널리 만물을 구제해야 합니다. 어찌 원하지 않는 사람을 노역시키고 창고의 저축을 소비하면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익을 얻어야겠습니까? 옛날에 당나라 덕종() 왕비의 부친인 왕경선()과 부마인 고염()이 황제의 수명 연장을 위하여 금동 불상을 주조하여 바쳤더니, 덕종이 ‘나는 억지로 만든 공덕은 공덕이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라 하고, 그 불상을 두 사람에게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마음이 실제와 부합하지 못했기는 하나, 신하와 백성들에게 이익 없는 일을 못하게 하고자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 조정에 겨울·여름의 강회() 및 선왕()·선후()의 기일재()104)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함부로 취하거나 버릴 수는 없지만, 그 나머지 줄일 수 있는 불교 행사는 줄이길 바랍니다. 만약 줄일 수 없다면, 『예기』의 월령()105)에서 말한 내용을 따르셔야 합니다. 즉 ‘5월 중기( : 하지)는 음기와 양기가 다투고 죽음과 삶이 나누어지는 때이니, 군자는 재계하고 거처함에 반드시 몸을 숨기고 조급하게 굴지 말 것이며, 음악과 여색을 멀리하고 좋은 음식을 적게 먹어 기호와 욕심을 절제하여 심기를 안정시킬 것이며, 모든 관료들은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형벌을 없애서[106)] 음기가 이룩되는 것을 안정시켜야 할 것[107)]이다. 11월 중기( : 동지)는 음기와 양기가 다투고 모든 생명이 움트는 때이니, 군자는 재계하고 거처함에 반드시 몸을 숨기고 조급하게 굴지 말 것이며, 음악과 여색을 물리치고 기호와 욕심을 금지하여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며,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하면서 음기와 양기가 안정되는 것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5월과 11월에는 불사를 정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혹독하게 추우면 일하는 사람이 고통스럽고 음식물이 정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너무 더우면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뭇 독충들로부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으며 재에 받치는 음식이 정결하지 못할 것이니,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또 오늘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해도 내일 반드시 그에 따른 보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정치와 교화를 잘 시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바라건대 한해의 열두 달을 반으로 나누어 2월부터 4월까지와 8월부터 10월까지는 정사와 공덕을 반반씩 시행하시고, 5월부터 7월까지와 11월부터 정월까지는 공덕을 제외하고 오로지 정사만 닦아 날마다 정사를 듣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오후에는 군자가 사계절에 쓰는 의례를 지키면서 정사를 잘 돌보고 몸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시면 계절에 순응하게 되어 성상의 몸도 편안하시고 신하와 백성의 노고도 덜게 될 것이니, 어찌 큰 공덕이 아니겠습니까?

() 『논어』에는 ‘자기가 섬길 귀신이 아닌데도 이를 제사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다.’108)고 했고, 『좌전』에는, ‘귀신도 그의 동족이 아니면 제사를 받지 않는다.’109)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잘못된 제사에는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정에는 종묘와 사직의 제사가 아직도 법식대로 행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산악의 제사와 성수의 초제는 번잡스럽게 지내어 정도를 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제사는 자주 지내지 않아야 하는 법이니, 자주 지내면 번거롭고, 번거롭게 되면 공경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상께서 마음을 맑게 하고 공경을 다하여 진실로 게으른 태도가 없다고 하나, 향관( : 제사를 맡은 관리)들이 으레 하는 일이거니 여겨 싫증이 나서 공경을 다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그 제사를 흠향하겠습니까?

옛날 한나라 문제()는 제사지낼 때에 해당 관리들에게 공경히 지내되 복을 빌지는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식견은 탁월하여 훌륭한 덕이라 할 만합니다. 가령 천지신명이 사사롭게 복을 비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복을 내릴 수 있겠으며, 만약 사사롭게 복을 비는 것을 안다면 이는 자기 이익을 챙기고 잘 보이길 바라는 일로 군자를 기쁘게 하기도 어려울 것인데 천지신명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제사의 비용은 모두 백성의 고혈과 부역에서 나오는 것이니, 저의 어리석은 생각에 만일 백성의 부역을 쉬게 하여 환심을 얻는다면 그 복은 반드시 빌어서 얻는 복보다 많을 것이라 여깁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별도의 법식으로 하는 기도와 제사를 없애고, 늘 스스로 공손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품어 그것이 하늘에 이르면, 재해는 절로 물러가고 복록은 절로 오게 될 것입니다.

() 우리 조정에서 양인과 천인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창업한 초기에 여러 신하들 가운데 본래 노비를 소유했던 사람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본래 소유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종군하여 포로를 얻거나 재화로 사서 노비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태조께서 일찍이 포로를 풀어주어 양인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공신의 뜻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편리한 대로 따르도록 허락하였는데, 예순 남짓한 해가 지나도록 호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광종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노비를 조사110)하여 그 시비를 가리게 하니, 이에 공신들이 탄식하고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간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대목왕후()께서 간절히 간하였지만 임금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천한 노비들이 뜻을 얻어 존귀한 사람들을 능멸하여 업신여기고, 앞 다투어 허위 사실을 꾸며 본래의 주인을 모함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광종은 스스로 화의 원인을 만들어 놓고 그 피해를 막지 못했으며, 말년에 이르러 억울하게 사람을 죽여[111)] 덕을 크게 잃었습니다.

옛날 후경()112)이 양나라의 궁성을 포위하니, 임금의 측근인 주이()의 집 종이 성을 뛰어넘어 후경에게 투항하였습니다. 후경이 그 종에게 의동()113)이라는 벼슬을 주자, 그 종은 말을 타고 비단 옷을 걸치고서 성으로 가, ‘주이는 50년간 벼슬살이하여 겨우 중령군()이 되었으나, 나는 후왕에게 처음 벼슬살이하여 벌써 의동이 되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이에 성안의 종들이 다투어 나와서 후경에게 투항하므로 궁성이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난 일을 거울삼아 천한 노비들이 귀한 이들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시고, 노비와 주인과의 관계를 적절히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대개 벼슬이 높은 사람은 도리를 알아서 법에 어긋난 행위가 적으며, 벼슬이 낮은 사람도 단지 그의 지혜가 충분히 자기의 나쁜 짓을 덮을 수 없다면 어찌 양인을 천인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궁원()과 공경() 가운데, 위세로써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혹시 있다 할지라도, 지금의 정치가 거울처럼 밝고 사사로운 것이 없으니 어찌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주나라의 유왕()과 여왕()이 도를 잃었다 하여도 선왕()과 평왕()의 덕을 가릴 수 없었으며, 한나라의 여후()가 덕이 없다 하여도 한나라의 문제()와 경제()의 어짐에 누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 판결을 주관하시면서 중요한 일은 상세하고 명백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할 것이며, 앞 시대에 판결한 사건은 자꾸 캐내고 따져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단서를 열지 않아야 합니다.”

최승로는 왕이 뜻을 가지고 있어 함께 좋은 정치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글을 올렸다. 위의 스물 두개 조항 이외, 나머지 여섯 조항114)은 사서에 전해지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승로 [崔承老]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