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9일 화요일

영조, 통청권, 한림회천권 혁파

숙종실록 16권, 11년(1685 을축 / 청 강희(康熙) 24년) 11월 3일(기미) 2번째기사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민서가 말하기를,
“전일에 ‘전랑(銓郞)이 통색(通塞) 을 멋대로 한다’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당하관(堂下官)의 청망(淸望)을 통색하는 것은 이것이 낭관(郞官)의 직책(職責)입니다. 그러니 그 직임(職任)에 두고서도 통색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치가 없습니다. 낭관(郞官)은 본조(本曹)의 요속(僚屬)들입니다. 당상관(堂上官)은 스스로 선발하여 의망(擬望)하지만 당하관(堂下官)의 청망(淸望)만은 낭관들로 하여금 전례에 의하여 통색하게 하고 당상관과 낭관이 서로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하여 낭관에게 전적으로 책임지우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낭관은 직책(職責)을 잃지 아니하면서 폐습(弊習)은 저절로 변하여질 것입니다.”
하니, 정재숭이 아뢰기를,
“이는 폐단이 없을 듯하니, 시행함이 좋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기를 명하였다.


안녕하세요. 답변드립니다. 지적하신대로 답변에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관련 자료들을 조사한 결과 현재 교과서의 서술대로 영조 17년에 전랑의 권리(자대권, 통청권 등)가 완전히 혁파된 것이 정설로 판단됩니다. 숙종 11년의 조처는 자대권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킨 조처였으며 완전한 폐지는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래에 <숙종실록>의 관련 항목을 첨부했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좀더 자세한 사항은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아름다운 날, 2007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9. 04. 15-질문, 4.16 답변) 이조전랑으로 제목, 내용으로 검색하면 위에 답변 내용이 나오네요.


영조실록 53권, 영조 17년 4월 19일 계축 2번째기사 1741년 청 건륭(乾隆) 6년

이조 낭청을 통청하는 법과 한림을 회천하는 규례를 혁파하도록 명하다국역원문 .


이조 낭청을 통청(通淸)하는 법과 한림(翰林)을 회천(回薦)하는 규례를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늘 조정의 붕당(朋黨)을 근심하였는데, 이조 낭청과 한림을 선발할 때를 당하면 피차 두 당에서 서로 부호하고 억제하며 싸우기를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그들의 하는 짓을 싫어하고 미워하여 이미 경장(更張)할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송인명(宋寅明) 조현명(趙顯命) 원경하(元景夏) 정우량(鄭羽良) 등 여러 사람들이 극력 찬성하니, 이에 임금의 뜻이 결정되어 이 날 한림 황경원(黃景源)을 불러다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하문하기를,

"한림의 추천은 국초(國初)에 시작되었는가?"

하였는데, 황경원(黃景源)이 말하기를,

"국초부터 있었습니다만, 광해군(光海君) 때에 이르러 이이첨(李爾瞻)이 대제학으로 추천을 주관하면서 흉당(凶黨)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관각(館閣)에서 추천을 주관하는 법이 이이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조(仁祖)께서 개옥(改玉)하기에 이르러 추천하는 법이 옛날대로 회복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하교하기를,

"기강(紀綱)이 위에 있으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권병(權柄)이 아래에 있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우리 나라는 예의(禮義)로 법을 제정하여 개국(開國)한 이후로 권신(權臣)이 권병을 도둑질한 경우는 없었으나, 다만 문(文)을 숭상한 폐단이 있었으니, 어찌 쇄약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아! 당습(黨習)이 나의 여러 신하들을 함몰(陷沒)시키고 기강을 문란시키고 있으니, 교목(喬木)의 신하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편당 만드는 것뿐이다. 사물이 극도에 이르면 통(通)하게 되는 것은 이치의 떳떳함이고, 폐단이 극도에 이르면 바뀌어지는 것은 일의 적당함이다. 그것을 만약 고치거나, 바꾸려고 한다면 마땅히 그 근본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이조 낭청의 추천은 비록 혁파하더라도 통청(通淸)하는 권한이 그대로 있으면, 이름은 바꾸었다고 하지만 폐단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국초의 옛 제도가 아니고, 또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기재되어 있지도 않은데, 낭관이 사사로운 뜻을 행하는 문(門)을 따라 우리 조정의 공정함을 전하는 법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나의 뜻은 경장(更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구전(舊典)을 따라 폐단을 인해서 개혁하려는 것이다. 이조 낭청의 통청을 마땅히 먼저 혁파해야 할 것이니, 그 절목(節目)을 대신과 총재(冡宰)가 고사(故事)를 널리 상고하여 품지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한림의 추천은 3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규례인데, 비록 하루아침에 혁파할 수는 없다 하나, 한번 함께 병용한 후부터 분경(奔競)과 야료가 오로지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저편에서 패하면 이편에서 추천하고 이편에서 패하면 저편에서 추천하는 등 마치 서로 보복하는 듯하니, 이 뒤로는 한번 방(榜)을 써 붙인 뒤에 응당 한림으로 추천할 자는 분관(分館)하는 예에 의거하여 빠뜨림 없이 모두 추천한다면, 결단코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서로 야료를 부리는 폐단이 없어질 것이다. 본관(本館)의 영사(領事) 감사(監事)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하여금 일제히 모여 절목을 강정(講定)해서 아뢰도록 하라. 아! 권강(權綱)이 아랫사람에게로 옮겨지면, 왕정(王政)이 진작되지 못하니, 그 계획과 그 결단을 윗사람이 하지 아니하고 누가 하겠는가? 아! 소신(小臣)들은 사사로운 뜻을 행하려고 감히 저지시키거나 방해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9책 5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11면
【분류】
인사(人事) / 왕실-국왕(國王)

【분류】

2015년 12월 28일 월요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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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 19일 발효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 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실현하여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 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1장 남북화해

제1조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제2조 남과 북은 상대방의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아니한다.
제3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한 비방·중상을 하지 아니한다.
제4조 남과 북은 상대방을 파괴·전복하려는 일체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
제5조 남과 북은 현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하며 이러한 평화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군사정전협정을        준수한다.
제6조 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대결과 경쟁을 중지하고 서로 협력하며 민족의 존엄        과 이익을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
제7조 남과 북은 서로의 긴밀한 연락과 협의를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판문점에 남북연락사무소를 설치·운영한다.
제8조 남과 북은 이 합의서 발효 후 1개월 안에 본회담 테두리 안에서 남북정치        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남북화해에 관한 합의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구체적        대책을 협의한다.


 
          제2장 남북불가침

제9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fir하지 아니한다.
제10조 남과 북은 의견대립과 분쟁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제11조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제12조 남과 북은 불가침의 이행과 보장을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남북군사 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한다.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는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의 통보 및 통제문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문제, 군인사교류 및 정보교환 문제, 대량살상무기와 공격능력의 제거를 비롯한  단계적 군축 실현문제, 검증문제 등 군사적 신뢰조성과 군축을 실현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추진한다.
제13조 남과 북은 우발적인 무력충돌과 그 확대를 방지하기 위하여 쌍방 군사당국자 사이에 직통 전화를 설치·운영한다.
제14조 남과 북은 이 합의서 발효 후 1개월 안에 본회담 테두리 안에서 남북군사분과위원회를 구성하여 불가침에 관한 합의의 이행과 준수 및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구체적 대책을 협의한다.


          제3장 남북교류·협력

제15조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통일적이며 균형적인 발전과 민족전체의 복리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자원의 공동개발, 민족 내부  교류로서의 물자교류, 합작투자 등 경제교류와 협력을 실시한다.
제16조 남과 북은 과학·기술, 교육, 문화·예술, 보건, 체육, 환경과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및 출판물을 비롯한 출판·보도 등 여러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실시한다.
제17조 남과 북은 민족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왕래와 접촉을 실현한다.
제18조 남과 북은 흩어진 가족·친척들의 자유로운 서신거래와 왕래와 상봉 및 방문을 실시하고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을 실현하며, 기타 인도적으로  해결할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다.
제19조 남과 북은 끊어진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고 해로, 항로를 개설한다.

 
제20조 남과 북은 우편과 전기통신교류에 필요한 시설을 설치·연결하며, 우편·전기통신 교류의 비밀을 보장한다.
제21조 남과 북은 국제무대에서 경제와 문화 등 여러분야에서 서로 협력하며 대외에 공동으로 진출한다.
제22조 남과 북은 경제와 문화 등 각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실현하기 위한 합의의 이행을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남북경제교류·협력공동위원회를 비롯한  부문별 공동위원회들을 구성·운영한다.
제23조 남과 북은 이 합의서 발효 후 1개월 안에 본회담 테두리 안에서 남북교류·협력분과 위원회를 구성하여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구체적 대책을 협의한다.


          제4장 수정 및 발효

제24조 이 합의서는 쌍방의 합의에 의하여 수정·보충할 수 있다.
제25조 이 합의서는 남과 북이 각기 발효에 필요한 절차를 거쳐 그 문본을 서로 교환한 날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1991년 12월 13일


           남 북 고 위 급  회 담                   북 남  고 위 급  회  담
           남측 대표단 수석 대표                   북 측  대 표 단  단  장
           대    한     민    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 무 총 리 정원식                      정 무 원 총 리 연형묵



최익현

1868년에 올라온 최익현의 상소
첫째는 토목 공사를 중지하는 일입니다. 나라 임금의 급선무는 덕업(德業)에 있고 공사를 일으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초가집과 흙 섬돌은 요(堯) 임금이 위대하게 된 것이고, 낮은 궁실(宮室)에 변변치 못한 의복은 우(禹) 임금이 흠잡을 수 없게 된 이유입니다. 이 때문에 이들의 빛나는 자취가 모두 책에 쓰여 있습니다. 만일 고금의 사변을 모두 믿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본받고자 한다면 그 까닭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말을 깊이 생각하시고 아직 시작하지 않은 공사를 한결같이 모두 정지시킴으로써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소서.

둘째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는 정사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재물은 백성들이 하늘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대학(大學)》에, ‘재물을 모으면 백성들이 흩어지고 재물을 흩으면 백성들이 모여든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나라의 재용(財用)이 고갈된 때를 당하여 방대한 역사를 시작하였으므로 형편상 백성들에게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어서 이렇게 한때의 임시방편의 정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대내(大內)가 완공되어 이어(移御)하신 것이 얼마 전이었는데도 원납전(願納錢)의 징수를 정파(停罷)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느 때에 가서야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당백전(當百錢)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경비가 부족한 것을 근심하시어 이렇게 의로운 발기를 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조치입니다. 그러나 시행한 지 2년 동안에 사·농·공·상이 모두 그 해를 입었는데, 그 피해가 되풀이되어 온갖 물건이 축나고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토지에서 생산되는 것이 전보다 줄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현 시기의 형편과 세상 인심이 절로 그렇게 된 것뿐입니다. 이제 옛날 돈이 통용되어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모두 말하기를, ‘이 돈은 앞으로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는데, 단지 집집마다 바치라는 방(榜)만을 볼 수 있을 뿐 영구히 혁파한다는 밝은 명을 들을 수 없으므로 여러 사람들의 의혹이 점점 짙어가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미혹되지 않도록 하소서.

넷째는 문세(門稅)를 받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당당한 천승(千乘)의 재부로써 이해를 타산하여 이미 백관(百官)과 각 군문에 지급하는 녹봉을 삭감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각 항목의 견감(蠲減)한 물건도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겨 섶을 팔고 쌀을 파는 사람들에게 한 푼 두 푼 구걸하면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지 않으니, 이것은 참으로 이웃 나라에 알려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즉시 금지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이 없게 한다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1873년에 올린 상소다.
신은 몇 해 전에 부름을 받고 마지못해 벼슬의 반열에 나왔으나 며칠도 못 가서 까닭 없이 견파(譴罷)당하였으니, 신의 변변치 못하고 사람답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벌써 환히 알고 계신 바입니다. 그때부터 시골로 물러가서 고생을 달게 받으며 낮은 벼슬자리도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승지와 같은 훌륭한 벼슬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명을 듣고 나서 놀랍고 황송하여 더욱 죽을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일들을 보면 정사에서는 옛날 법을 변경하고 인재를 취하는 데에는 나약한 사람만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대신(大臣)과 육경(六卿)들은 아뢰는 의견이 없고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들은 일을 벌이기 좋아한다는 비난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속된 논의가 마구 떠돌고 정당한 논의는 사라지고 있으며 아첨하는 사람들이 뜻을 펴고 정직한 선비들은 숨어버렸습니다.

그칠 새 없이 받아내는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있으며 떳떳한 의리와 윤리는 파괴되고 선비의 기풍은 없어지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괴벽스럽다고 하고 개인을 섬기는 사람은 처신을 잘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염치없는 사람은 버젓이 때를 얻고 지조 있는 사람은 맥없이 죽음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런 결과로 인해 위에서는 천재(天災)가 나타나고 아래에서는 지변(地變)이 일어나며, 비가 오고 날이 개이고 춥고 덥고 하는 기후 현상에서는 모두 정상적인 상태를 잃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는 아무리 노련하고 높은 덕망으로 세상 사람들의 추대와 신망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담당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견제당하고 모순에 빠져 힘을 쓰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신과 같이 본바탕이 어리석고 학식도 전혀 없는데다가 외롭고 약하여 어찌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전하의 총애만 믿고서 본분에 지나친 것을 삼가라는 경계와 복이 지나치면 재앙을 당한다는 교훈을 생각하지 않고 벼슬 반열에 끼어 따라다니고 길가에서 떠들어대며 의기양양하게 자족하면서 아무것도 꺼리는 바가 없이 처신한다면 또한 사람들의 드센 비방과 무엄하고 불경스럽다는 주벌이 잇따라 일어나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이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달려 나가고 싶어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878년 10월 25일의 상소.
신은 일소(馹召)를 받았을 때 외람되이 개인의 사정을 진달하여 전하의 이해를 받으려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방의 공식 인편을 통하여 봉해 올린 글이 길에서 지체되어 제때에 올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상소문을 지을 적에는 신중히 잘하지 못하여 꺼리는 문제들을 건드림으로써 명령에 대해 태만한 죄가 드러났으며 가까이 있는 관리들과 높은 관리들의 비위를 거슬렀으므로 행장을 갖추고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하늘같이 큰 도량으로 포용하며 변변치 않은 말도 받아들이고 조그마한 질책도 없었을 뿐 아니라 관례를 뛰어넘는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신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고 구부려 남 보기 부끄럽습니다. 참으로 뜻밖에도 응당 받아야 할 벌을 요행 면하고 이렇듯 몹시 외람되고 분수에 넘치게 벼슬에 임명되었습니다.

대저 작록이란 나라의 명기(名器)입니다. 만일 적임자를 등용하지 못하면 위로는 임금의 정사에 오점을 가져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심정에 어긋나는 만큼 그로 인하여 미치는 폐해는 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신하가 물러가고 나아가고 하는 것으로 말하면 풍속의 성쇠와 염치의 중대한 의리에 관계되는 바가 이보다 더한 문제가 있는 데야 말할 것이 있습니까? 이러므로 신은 임금의 명령에 따라 응당 벼슬에 나가야 할 것을 나가지 않아도 공손치 못한 것이 되고,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을 나가는 것도 역시 공손히 못한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오늘날 형편을 놓고 말하면 신은 사실 어리석고 무식한 시골사람입니다. 설사 문을 지키고 야경을 서는 일도 오히려 감당할 수 없거늘 하물며 호조(戶曹)의 관리라면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재정이 부족하고 백성들이 곤궁을 겪고 있는 이때에 신과 같은 사람은 결코 잠시라도 이 벼슬자리에 무턱대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낮은 벼슬에 처하며 부(富)를 사양하고 가난에 처하는 것은 사양하고 받고 하는 데서 지켜야 할 큰 지조입니다. 신이 전날에 승지의 벼슬을 사양하였고 오늘날 순차를 뛰어넘어서 발탁된 벼슬에 도리어 태연스럽게 나가 앉아 있다면 참으로 이른바 만 냥은 사양하고 10만 냥을 차지하는 격이니, 장차 맹자(孟子)의 죄인이 되는 데서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가지 못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신이 연전에 망령되게 시정에 대하여 논하였으니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간삭(刊削)된 지 얼마 안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갔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지만 권종록(權鍾祿)의 상소에 대해서도 좋게 비답을 내리셨으니, 신의 죄에는 공경스럽지 못한 점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마땅히 해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형편없는 탓으로 하여 명예를 낚는다는 심한 무함이 신의 스승인 전 참판(參判) 이항로(李恒老)에게까지 미쳤으니, 이 어찌 몹시 억울한 노릇이 아닐 수 있습니까? 자신의 죄명도 씻지 못하고 스승이 당한 호된 무함도 해명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한 몸만 단호하게 얼굴을 쳐들고 나갈 수 없는 셋째 이유입니다.

전날에 역말로 불렀을 때 은혜와 총애를 탐내어 경솔하게 행동한 결과 염방(廉防)이 어그러지고 관리들에게 수치를 끼쳤으므로 속으로 자신의 결함을 반성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갈 수 없는 넷째 이유입니다.

태평했던 조정에서는 신이 한번 올린 상소로 시비가 터져 나와 대신들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리고 삼사(三司)가 연합하여 상소를 올리게 되었으며 전직과 직무 없는 관리로 있던 신하들도 성토가 바야흐로 팽팽해져서 죄악이 더욱 밝아졌습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갈 수 없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이 스스로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신이 형편상 안정할 수 없다는 것을 가엾게 여겨 이미 내린 명령을 속히 철회함으로서 공기(公器)를 중히 하시고 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기도록 해 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이미 나가지도 않으면서 의견도 아뢰지 않으면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역시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전하의 성덕을 받들어 빛내는 도리도 아니라고 봅니다.

지난번 상소 가운데 이미 문제를 끌어내고는 말을 자세하게 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늘의 의논을 보니, 정변구장 이륜두상(政變舊章彝倫斁喪) 여덟 글자를 가지고 신을 규탄하는 칼자루로 삼고 있으니, 신은 거듭 다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아! 우리나라는 은사(殷師) 이래로 이미 오랑캐의 옛 풍속을 고쳤고 본조(本朝)에 이르러서 여러 열성(列聖)이 잇달아 나오고 뭇 어진 이들이 많이 나타나 일세를 한 범위에 넣어 후손에게 넉넉함을 물려주게 된 것은 모두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고 정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한 번 다스려지는 운수를 담당한 것이었으니, 세워도 어그러짐이 없고 후세에 가서도 의혹이 없으며 이 세상을 마치도록 잊지 못 할 것입니다. 후세의 임금이나 후세의 백성들이 혹 하나라도 이와 반대로 하면 문물제도는 오랑캐와 같은 형편에 빠지고 사람들은 짐승의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니 하루도 익히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나라의 일들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불순하여 고치지 않으면 끝이 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고 심한 것을 보면 황묘(皇廟)를 없애버리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가 썩게 되었고, 서원(書院)을 혁파하니 스승과 생도들 간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의 후사(後嗣)로 나가니, 부자간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나라의 역적이 죄명을 벗으니 충신의 도리가 구분 없이 혼란되고, 호전(胡錢)을 사용하게 되자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별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이 몇 가지 조항들은 한 조각이 되어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윤리는 벌써 씻은 듯이 없어져 더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토목공사의 원납전(願納錢) 같은 것이 서로 안팎이 되어 백성들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대 임금들의 전장을 변경하고 천하의 의리와 윤리가 썩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에 신이 생각건대,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에 대해 논한다면 만동묘(萬東廟)를 복구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중앙과 지방의 서원을 짓지 않아서는 안 되며,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것을 막지 않을 수 없으며, 죄명을 벗겨준 나라의 역적에 대해 추후하여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호전을 사용하는 것도 혁파하지 않을 수 없고, 토목공사의 원납전의 경우도 한 시각이나마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이른바 황묘를 복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 왕조는 명나라에 대하여 이미 300년 동안을 신하로서 섬겨왔고 임진년(1592)에는 재조(再造)해 주었으니 만대를 두고 잊지 못할 은혜가 있으니, 만대를 두고 반드시 보답해야 할 의리가 있습니다. 옛날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은 천지가 뒤바뀌고 상하가 도치된 것을 통탄스럽게 여기면서 무기를 갖추어놓고 밤낮으로 뛰어난 인재를 기다렸습니다. 이때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물고기와 물처럼 계합(契合)하여 빈틈없는 계책을 세워 물리칠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운수가 제한되어 효종이 승하하여 일은 성공을 보지 못하니, 온 나라의 신민이 원통한 마음을 드러내 보일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 칸의 초가집을 지어놓고 제향을 올렸으니, 이것은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의리로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으며 먼 후세에 가서도 영원토록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의식 절차를 위에서 충분히 갖추어 거행하게 되어서는 이 제단을 설치하는 것으로도 크게 보답하지 못할 듯이 해야 하는데도 번잡하고 중첩되는 혐의를 품는 일이 있습니다. 삼가 열성조의 분부를 상고하여 보면 번잡하고 중첩되게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관심을 기울여 중시하면서 관청 토지를 떼어주어 제물을 공급하게 하였고 친히 편액(扁額)을 써주어 드러내 빛내주는 뜻을 보였으며, 인정에 따라 원칙을 세움으로써 먼 후세에 가서도 의혹됨이 없게 하라는 명령까지 있었습니다. 또한 전교하기를, 우리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황은의 혜택이 깃들어 있으니 집집마다 시동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들 안 될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선대 임금의 거룩한 뜻이 어찌 그저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기만 하고 그것을 폐지할 수는 없다는 의리에서만 나온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밝히기 어려운 것은 하늘의 이치이고 무너지기 쉬운 것은 인심입니다. 백성들의 위에 있는 사람들이 만일 지성으로 장려해서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다면 떳떳한 의리를 배양할 수 없고 영원히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우(夏禹)의 사당(祠堂)이나 태백(泰伯)의 사당 같은 것을 놓고 미루어보아 백성들이 슬픔에 잠겨 그러면서 백대를 내려가도 변함없는 것인 경우에는 틀림없이 시골에서 사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들은 여기에 더욱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훗날에 나온 성인들은 응당 그를 준수하며 고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 열성들이 의리를 바로잡아 전통을 드리운 것이 그와 같이 심원하였고 솔선 모범을 보이면서 조장 발전시켜준 수고가 그와 같이 빛나고 밝기 때문에 온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충성과 의리에 의한 교화에 감화되고 뼈 속에까지 깊이 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몇 해 전에 만동묘를 철폐할 때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은 전하의 뜻이 오로지 공경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서러워하며 슬피 울었던 것이며 온 나라 사람들의 심정은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 유신(儒臣)은 상소를 올려 의리를 진달하였고 각 도의 유생들은 서로 꼬리를 물고 합문(閤門)에 나와 엎드려 상소하였습니다. 이로써 떳떳한 양심이 모두 같고 여러 열성(列聖)들이 배양하여 놓은 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천하의 일에는 어진 사람들이 의견을 내고 많은 선비들이 같은 계(啓)를 하며 온 나라 사람들의 의견이 한결같은 경우에 공론이 아닌 것이 없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전하가 새롭게 정사를 총괄하면서 산만한 것을 정리하고 옳지 못한 것을 없애려고 한다면 공론에 대해서는 더구나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조용히 심사숙고하고 시원하게 생각을 바꾸어 빨리 제사를 회복하자는 요청을 허락함으로써 위로는 조종의 유지를 따라 준수하고 아래로는 나라 사람들의 심정에 부합되게 해 주소서.

만일 난처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어서 혹 말하기를, 중대한 예를 그만두었다가 갑자기 다시 설행한다면 성심으로 공경하는 것에 결함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주자는 태묘(太廟)의 예의 개정(改定)을 논하여 말하기를, ‘종묘의 예는 더없이 엄하고 중대한 일이니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놓고 보면, 오늘 황묘의 제사를 회복하는 것은 성덕에 더욱 빛을 드러낼 것이며 누(累)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 비속한 말들이 어찌 전하의 용단을 동요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서원은 흥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옛날의 교육은 집에는 숙(塾)을 두고 마을에는 상(庠)을 두며 주(州)에는 서(序)를 두고 나라에는 학(學)을 두어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배움에 있어서는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위로는 윤리가 밝아지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화목하게 지냈다고 봅니다. 지금 아조(我朝)의 성균관(成均館)이 옛날의 국학이며 향교(鄕校)도 옛날의 주서(州序)이고 서원은 옛날의 숙상(塾庠)입니다. 500가(家)에 한 개 ‘상’이 있은 뜻을 미루어 보면 만호나 되는 고을에 겨우 한두 개의 서원을 둔 것은 소략이 매우 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원을 둔 기본 뜻은 학문을 강론하여 도를 밝히는 것이 사실 주된 것이며 시골의 향선생(鄕先生)의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려는 일은 그 나머지 일이었습니다. 모의하지 않았는데도 널리 설치하게 되자 겹쳐서 제사지내는 것을 혐의쩍게 생각하여 이미 세운 것까지 함께 폐지하고 천이나 백에 열이나 하나만 남겨둔다면 학교에 관한 옛 제도와는 크게 어그러지며 창건한 본래의 뜻을 크게 잃게 될 것이니, 교육이 해이되고 풍속이 퇴폐해진 것을 이웃 나라에서 듣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명사(明史)》를 고찰하여 보면, 천하의 서원을 철폐한 것이 두 번 보이는데 그에 따라서 왕실이 뒤집혔으니, 이것이 또한 어찌 길상(吉祥)의 일로써 사람들이 원할 만한 일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삼가 바라건대, 속히 이미 내린 명을 환수하여 주소서. 다만 제사를 그만둔 서원에 대해서는 그 인물의 일생을 논하여 덕망도 공로도 없고 음사(淫祠)에 가까운 것은 모두 폐하되, 도덕이나 절의가 한 마을의 스승으로 될 만한 사람은 본향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며, 온 나라와 천하의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은 주(州)마다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고 곳곳에서 높여 보답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금대(金帶)가 많고 많으며 현송(絃誦)이 넘실거려서 옛날의 번성하던 시기에 못하지 않게 된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늘 오늘날의 서원은 실효는 없고 폐단만 있다고 하여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도 매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자공(子貢)이 희생으로 쓰는 양을 없애려고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너는 양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의를 아낀다.’ 하였습니다. 양이 남아 있으면 예도 회복될 가망이 있는 것이니, 서원을 철폐하면 어찌 학문이 영원히 폐지될 한탄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그 사람이 있으면 그에 따르는 정사도 거행되는 것이니 서원을 두면 실제 성과는 자연히 있게 될 것이고 폐단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밝게 살피소서.

이른바 귀신의 우사로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천륜(天倫)입니다. 그 낳아준 바를 버리고 남에게 후사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일에서 변고입니다. 옛날에는 오직 종가(宗家)에 후사가 없어야 이렇게 남의 자식으로 대를 잇게 하였는데 후세에 와서는 종가(宗家)고 방계고 먼 친척이고를 따지지 않고 뒤를 잇게 함으로써 그 길이 매우 넓어졌으니 이미 주공(周公)의 뜻에 어긋납니다. 이렇게 널리 만연되다 보니 신주에 후사를 세워주는 풍속까지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옛날의 예법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귀신의 도리로나 사람의 도리로 보아도 대단히 공손하지 못한 노릇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종친(宗親)들을 화목하게 대하고 어진 선비들을 내세워주며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것은 천지와 같이 사물을 살려 주시려는 심정에서 출발한 것이고 화육(化育)을 도우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도리에 맞게 처리하는 것이 마치 정조(正祖)가 고 판서(故判書) 유몽인(柳夢寅)을 위하여 제사를 지낼 후손을 세워준 것처럼 한다면 의로운 발기가 만대를 내려갈 법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일을 맡은 신하가 물어 보지도 않고 자신이 사적으로 아는 것에 빙자하여 그릇된 규례를 답습하여 시행하였습니다. 이에 이익을 쫓아 어버이는 잊고 확상(矍相)의 활쏘기에서 쫓겨난 무리들이 때를 타서 부합하여 자기의 부(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고조부(高祖父)를 끌어대었으며 나아가서는 9대 조상이나 10대 조상들까지 끌어다가 기꺼이 대를 잇게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대수가 비게 되면 각 갈래의 귀신들을 억지로 끌어다 맞추어 그 대수를 채우고 자기의 조상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하늘의 이치에 가깝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정에 편안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끊어진 대를 이어주려는 전하의 본의는 그처럼 훌륭하였지만 봉행하는 신하가 잘 받들지 못하여 마침내 금지옥엽과 같은 후예로 하여금 이익을 보고 의리를 잊어서 못하는 짓이 없어 오랜 역사를 더럽히고 있으니,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나라의 역적에 대해서는 소급하여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윤리는 천하의 대륜(大倫)이며 이 천지 사이에서 도망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이 명하고 하늘이 토벌하는 것은 만대의 공의(公儀)이므로 한 번도 사람이 사사로운 뜻으로 옮겨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등극하신 초기에 속된 무리들이 멋대로 하여 사설(邪說)이 횡행(橫行)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정(邪正)을 묻지 않고 충역(忠逆)도 살피지 않고는 그저 죄명에 걸려든 모든 사람들을 다같이 신설(伸雪)해 주고 화기를 인도하여 맞이하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대저 화(和)를 말한다면 공평(公平)한 것이며 바른 것입니다. 하늘을 놓고 말하면 비 오고 개고 춥고 더운 것이 각각 때에 알맞은 다음에야 화기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놓고 말하면 기뻐하고 성내어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모두 절도(節度)에 알맞은 연후에야 화기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비 오고 개고하는 것이 때를 어기거나 기뻐하고 성내는 것이 마땅함을 잃어서 혹 항상 비가 오거나 기쁨에만 치우친다면 사리에 몹시 어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화평하고 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설해 주어야 할 것을 신설해 주었다면 화기를 이끌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설해 주지 말아야 할 것을 신설해 주어도 화기를 이끌어올 수 있습니까? 응당 신설할 것을 신설해 주지 않으면 물론 화기를 손상시키게 되고 벗겨주지 말아야 할 것을 벗겨주어도 화기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신설해 준 사람들 중에서 신설해 주어서는 안 될 자들은 특히 나라의 역적들이며 이 나라의 역적들 중에서도 더욱 심한 자는 혼조(昏朝)의 한효순(韓孝純)과 기사년(1569)의 이현일(李玄逸)과 목내선(睦來善)입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륜(大倫)을 무너뜨리고 하늘의 의사에 따라 천벌을 주는 공정한 원칙을 어긴다면 떳떳한 윤리와 도리에 어그러지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을 터인데 어떻게 화기를 이끌어다가 성궁(聖躬)에 복을 돌릴 수 있습니까? 이것은 결코 성조(聖朝)의 독단이 아니라 속류들의 사설이 해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더욱 깊이 생각하고 변별하여 법과 의리로 재단하여 용서할 것은 용서하되 마치 화기로운 바람에 단비가 내리듯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응당 죄를 주어야 할 자들은 죄를 주기를 드센 우레가 울고 된서리가 내리듯이 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인륜을 세워 화기를 가져올릴 것이며 만물의 운명을 바로잡아 많은 복을 받도록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가 더없이 다행하게 되고 만대를 두고 더없이 다행하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호전(胡錢)을 혁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중화(中華)와 오랑캐를 엄하게 구별하며 통분함을 참는 마음을 보존하는 것은 효종(孝宗)과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전해준 심법(心法)으로써 그 공로는 공자(孔子)나 주자(朱子)의 공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정(先正)이 오랑캐들의 물건매매를 금지하였던 일로 보면 호전을 쓰는 것은 역시 옛적 회계에서 신하 노릇하고 첩 노릇한 수치를 잊거나, 음양의 향배(向背)에 관한 구분에 어두운 것이니, 정사에 펴서 일에 폐해를 끼친 것이 이미 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은 전날에 벌써 당백전(當百錢)을 폐지할 것을 청한 바 있는데 오랑캐 돈의 폐해는 당백전보다도 심합니다. 당백전의 폐해는 모든 물건들이 유통되지 못하게 하고 오랑캐 돈의 폐해는 모든 물건을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당백전의 폐해는 마치 속이 결리고 아픈 증세와 같아서 배를 씻어 내리는 약을 써서 내려가게 하면 전과 다름없이 나아지지만 오랑캐 돈의 폐해는 설사증과 같아서 원기가 날로 빠지는데 그것이 다 빠지면 죽어버리게 되니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의도로 보아도 그렇고 이해관계를 보아도 또한 이러하니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다시 쓰는 문제는 단 하루도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 성헌(成憲)을 변란 시키는 몇 가지 문제는 실로 전하께서 어려서 아직 정사를 도맡아보지 않고 계시던 시기에 생긴 일이니, 모두 전하 자신이 초래시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일을 책임진 관리들이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린 결과 나라의 기강이 모두 해이되게 되었고 오늘날의 폐해를 초래케 하였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임금이 권한을 발휘하고 침식을 잊을 정도로 깊이 생각하고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속론과 사설에 이끌리지 말고 가까이 돌거나 권세 있는 관리들에게 속지 말며 기를 부리는 현상이 없게 하고 본래의 마음을 깨끗이 가지며 욕심을 깨끗이 다하여 하늘의 이치가 유행되게 할 것입니다. 정령(政令)을 내려 조치함에 있어서 응당 집행해야 할 것은 사나운 우레나 바람과 같이 드세게 시행하며 응당 제거하여야 할 것은 제거하고 쇠를 끊듯이 단호하게 잘라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주 명령을 내려 조신(朝臣)들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의혹함이 없는 원칙을 세우고 덕을 수양하는 책임은 어진 스승에게 맡기고 관리들을 등용하고 물리치며 음양을 조화롭게 하는 책임은 정승들에게 맡기고 임금의 부족한 점을 도와주고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책임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 맡길 것입니다. 임금을 위하여 토론도 하고 사고도 하며 임금을 바른말로 깨우쳐주는 책임은 유신들에게 맡기며, 군사를 훈련하고 선발하며 외적을 막는 일은 절도사(節度使)들에게 맡기고, 돈과 곡식의 출납과 군사비용에 대해서는 유사(有司)에게 맡기고, 효도가 있고 청렴한 사람을 뽑으며 선비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감사에게 맡길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지위에 있지 않고 다만 종친의 반열에 속하는 사람은 그 지위만 높여주고 후한 녹봉을 줄 것이며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면서 《중용(中庸)》에서 아홉 가지 의리에 대한 교훈과 직분에서 벗어나 정사를 논하는 데 대한 《논어(論語)》의 경계(警戒)를 어기지 말고 잊지 말아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도록 하소서. 이미 썩은 윤리를 다시 펴고 위태로운 나라의 형편을 안정시킨다면 백성들은 태평세월을 즐기게 되고 종묘와 사직은 만년의 향사(享祀)를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가 당요(唐堯)나 우순(虞舜)과 같은 임금이 되면 대소(大小)와 원근 할 것 없이 모두 다행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 미미한 신이 비록 시휘(時諱)에 저촉되고 뭇 사람들의 노여움을 범하였으니, 천만 번 죽더라도 구구한 광영이 가문에 흘러넘칠 것입니다. 신은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근심하는 지극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은 적들의 배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의정부(議政府)에서 응당 확정적인 의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여러 날 동안 귀를 기울이고 기다렸으나 아직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항간에는 그들의 속셈이 화친을 요구하는 데 있을 것이라고 소문이 떠돌아 입 가진 사람은 모두 분격하며 온 나라가 뒤숭숭합니다. 이 소문이 시행된다면 전하의 일은 잘못되고 말 것입니다.

화친이 상대편의 구걸에서 나오고 우리에게 힘이 있어 능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어야 그 화친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겁나서 화친을 요구한다면 지금 당장은 좀 숨을 돌릴 수 있겠지만, 이후 그들의 끝없는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습니까?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그들의 물건은 모두 지나치게 사치한 것과 괴상한 노리갯감들이지만, 우리의 물건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것들이므로 통상한 지 몇 년 되지 않아서 더는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나라도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핑계대지만 실제로는 서양 도적들이니, 화친이 일단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이 전파되어 온 나라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그들이 뭍에 올라와 왕래하고 집을 짓고 살게 된다면 재물과 부녀들을 제 마음대로 취할 것이니,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네 번째 이유입니다.

이런 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병자년(1636)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일을 끌어들여 말하기를, ‘병자년에 화친을 한 뒤로 두 나라가 서로 좋게 지내게 되어 오늘까지 관계가 반석 같은데, 지금은 왜 그렇게 할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합니다. 저들은 재물과 여자만 알고 사람의 도리라고는 전혀 모르는데, 그들과 화친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뒷날에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크게 쓰기를, ‘아무 해 아무 달에 서양 사람이 조선에 들어와 아무 곳에서 동맹을 맺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기자(箕子)의 오랜 나라가 하루아침에 오랑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순조(純祖) 때에는 서양 사람이 몰래 들어왔다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고, 우리 헌종(憲宗)도 들어와서 염탐하는 자들을 모두 주륙하였으니 이것이 전하의 가법(家法)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기어든 왜인들은 서양 옷을 입고 서양 포를 쏘며 서양 배를 타고 다니니, 이는 왜인이나 서양 사람이나 한 가지라는 것의 뚜렷한 증거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속겠습니까?

감히 고려 때의 우탁(禹倬)과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의 고사를 본받아 도끼를 가지고 대궐 앞에 엎드렸으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큰 계책을 세우고, 조정 관리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짐승을 끌어들여 사람을 해치려고 꾀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으로 처단하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도끼로 신에게 죽음을 내리신다면 조정의 큰 은혜로 여기겠습니다.

일곱째, ‘민당’을 혁파하여 변란의 발판을 막으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비방하는 것을 써놓는 나무와 진언(進言)할 때 치는 북이 있었으며,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도 또한 유생들이 대궐문에 엎드리고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이 시위(示威)의 표시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린 일이 있었으니, 진실로 백성들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계가 있고 절제가 있어서, 차라리 정사에 대해 비방은 할지언정 대신을 협박해서 내쫓는 일은 없었으며, 차라리 소장을 올려 호소는 했을지언정 임금을 위협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늘 이른바 ‘민당’이라는 것은 시정(市井)의 무식한 무리들을 불러 모은 것으로서, 구차하게 패거리를 규합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명분을 빌려서 대신(大臣)들을 멋대로 명하여 오라 가라 하고 임금을 지적하여 탓하며 나라의 정승을 능욕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저들끼리 결탁하여 고함을 지르며 위엄을 보이고 생색을 내는 것이 굉장하여 그 기세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아! 이로부터 정사에 관한 권한과 권세가 모두 백성들에게 옮겨가 앞으로 조정에서는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일도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가의(賈誼)가 말한 바, ‘발이 도리어 위에 있고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다.’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비슷합니다. 이와 같은데도 금지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어찌 법과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외국에는 이른바 자유 의원(自由議員)과 민권(民權)을 주장하는 당(黨)이 있고, 심지어는 직접 선거하는 민주(民主)의 제도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 이 무리들이 이미 대신을 협박해서 쫓아낸 것이 여러 번 되는 만큼, 비록 여기서 한층 더한 일인들 또한 무엇이 두려워서 못하겠습니까? 설령 이 무리들이 진심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도리를 놓고 생각해볼 때, 그런 징조를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듣건대, 성상께서 분발하시고 큰 결단을 내리시어 모두 제거하신다고 하니, 진실로 더할 나위 없는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잘 처리하지 못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허물을 자신에게서 찾고 지극한 정성과 측은한 마음으로 충분히 생각을 고칠 뜻을 보이시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사랑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친구 간에 신임하며 임금을 공경하고 윗사람을 친근하게 대하는 도리로써 깨우쳐 그들을 감복시키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더욱 심한 자 몇 사람을 다스리고 나머지는 법사(法司)로 하여금 해산시켜 보내도록 하며, 서둘러 정사와 형벌을 밝히고 교화를 힘껏 시행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임금이 과연 우리를 속이지 않고 진실한 마음과 실질적인 정사로 시종여일하는구나.’라고 분명히 알게 한다면,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안정되지 않을까 근심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저 어리석은 백성들은 함께 불복하는 마음을 품고서 도리어 윗사람을 원망하는 뜻을 쌓게 될 것입니다. 갑자기 그들을 꺾자고 한다면 화(禍)의 기미를 촉발하게 되고 내버려둔 채 따지지 않고자 한다면 교만이 자라날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백성은 물과 같고 임금은 배와 같으니,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으며, 또한 배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매우 절절하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이것을 보고서 속히 도모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2015년 9월 2일 수요일

고려 - 최승로 오조정적평 시무23조


성종 원년(982)에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이 되었다. 그 때 왕이 신하의 진언을 요구하자 최승로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신은 시골에서 생장해 성품이 우매하고 학문이나 기예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태평한 세상을 만나 오래 동안 근시()의 직임을 외람되게 맡았고 여러 차례 특별한 영예를 입었습니다. 지금의 폐습을 바로잡을 뛰어난 정책은 부족하지만 마음에 간직한 일편단심으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살펴보건대, 당나라 현종() 개원()6) 연간에 사신()으로 있던 오긍()은 『정관정요()』7)를 지어 현종에게 태종()의 선정을 본받도록 권고하려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시대의 상황이 서로 비슷하고 한 왕실인데다 정치가 훌륭하여[8)] 모범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살펴보니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고 왕통을 물려주신 것[9)]은 곧 개조()의 공이요, 여러 임금들이 왕위를 물려받아 위업을 계승한 것은 뒤 임금들의 덕입니다. 개조께서 나라를 세워 자손의 행복과 경사를 열어주신 반면, 뒤 임금들은 중흥과 침체를 거듭했으나 일면 부족함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정치에 치란이 있고 일에 선악이 있으며, 시작할 때와 같이 마무리를 잘하지 못해 위태롭고 어지러운 지경에 이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니,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개국한 이래로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두 저의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5대 조정에서 정치와 교화가 잘되었거나 잘못된 사적을 기록하여 본받을 만하고 경계할 만한 것을 조목별로 아뢰겠습니다.

삼가 살펴보니 우리 태조신성대왕()께서 왕위에 오르신 그 시기는 난세[10)]에 해당하였고 운수는 천년에 합치[11)]하였습니다. 처음에 내란을 평정하고 흉악한 무리를 정벌할 때, 하늘이 임시로 그 일을 맡을 군주를 내어 그의 손을 빌리었고, 그 뒤에 도참비기()의 예언에 따라 천명을 받고서 왕의 자리에 오르니 사람들이 태조의 덕망을 알고서 따르고 복종하였습니다. 곧 신라[12)]가 스스로 멸망하였고 고려[鹿]13)가 다시 일어나는 운을 타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곧 대궐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요하()와 패수(浿)14)의 놀란 파도를 진정시키고 진한()15)의 옛 땅을 얻어 열아홉 해만에 천하16)를 통일하였으니, 공적은 더없이 높고 덕망은 한없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란()은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하고17) 있으니 먼저 우호를 맺어야 하며, 저들 또한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국교를 거절했던 것은 저들이 발해와 서로 연합했다가 갑자기 의심하면서 옛 동맹을 돌아보지 않고 하루아침에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조는 이같이 무도한 나라와 국교를 맺을 수 없다고 여겨 그들이 바친 낙타를 모두 버리고 기르지 않았습니다. 그 심원한 계책으로 우환을 미연에 막고 위태롭기 전에 나라를 보존함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발해는 거란의 군사에게 격파되고 그 나라의 세자인 대광현()18) 등이 우리나라가 의리로 흥기하였으므로 남은 무리 수만 호를 거느리고 밤낮으로 길을 재촉하여 달려왔습니다. 태조는 이들을 더욱 가엾게 여기고, 영접하여 대우함이 매우 두터웠고, 성씨와 이름을 내려주기까지 하였으며, 그들을 종실의 적()에 붙이어서 자기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문무 참좌() 이하에게도 모두 벼슬과 품계를 넉넉하게 내려 주었습니다. 이렇듯 열심히 멸망한 나라를 보존해 주고 끊어진 제사를 이어가게 해 줌으로써,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복속하게 만든 것입니다.

후백제()19)의 견훤은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며 변란을 좋아하여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못살게 했습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쉴 겨를도 없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죄를 다스리어 마침내 망해가는 신라를 바로잡았으니,20) 그가 옛 임금을 잊지 않고 기울어가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 안정시킨 것이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신라 말기부터 우리나라 건국 초기까지 서북의 변방 백성들은 늘 여진() 오랑캐21)의 기병이 침구해 노략질하는 통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태조는 마음속으로 용단을 내리고 한 사람의 뛰어난 장수22)를 보내어 그 곳을 지키게 하니, 칼 한 번 휘두르지 않고도 도리어 미개인들이 귀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국경 밖이 조용해지고 변방에 근심이 없었으니 태조께서 사람을 알아보고 임무를 적절히 맡기며,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고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을 능숙하게 다룸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라의 임금과 신하들은 운수가 다하여 스스로 귀화하기를 간청23)했으나, 태조는 두 세 번 사양하다가 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동쪽으로는 명주( :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로부터 흥례부( : 지금의 울산광역시)에 이르기까지 1백 십여 성들이 다들 태조의 인후함을 흠모해 때 맞춰 와서 복종했습니다. 태조께서 예로써 사양하여 사람들이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이 또한 이러했던 것입니다.

다만 남쪽으로 후백제를 평정하면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했습니다. 군사를 동원함이 전후 수차례였으나 태조의 깃발과 군마 앞에서 어떤 자는 전쟁터에 나서자마자 바로 투항했고 어떤 자는 풍채를 우러러 보다 두려워서 투항했습니다. 비록 창과 칼을 마주하고 싸워도 살상하지 않으려 했으니, 이는 어진 사람에게 적이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견훤은 죄악을 쌓은 지 수십 년 만에 반역한 자식에게 갇혔다가 우리나라로 도망해 와서 반역한 자식24)들을 무력을 빌려 토벌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후한 예로 맞아들였고, 그가 죽자 부의를 넉넉하게 내려주었습니다. 내세와 현세에 두루 걸친 도덕과 삶과 죽음에 두루 통한 의리가 이와 같았습니다.

후백제를 평정하고 태조가 도성에 들어가서 궁핍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어 구휼하였고, 위로와 회유를 두텁게 더하였으며 여러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백성의 재물을 털끝만큼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 남북이 오래 동안 분열되고 신구()25)가 구별되었으나 태조가 이를 한결같이 어루만지어 시종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태조의 도량이 크고 너그럽고 관대함26)이 또한 이러했습니다.

통일을 이룩한 이래로 여덟 해 동안 정사에 부지런하였고, 예로써 큰 나라를 섬기고 도의로써 이웃 나라와 사귀었으며, 편안할 때 안일하지 않았고 아래 사람을 접할 때 공경했습니다. 도덕을 소중하게 여기고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했습니다. 궁실()을 낮게 지어 겨우 비바람을 가리고자 했으며, 거친 옷을 입어 단지 추위와 더위만을 막았습니다. 어진 이를 좋아했고 착한 일을 즐겼으며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랐습니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의 바르고 겸한 마음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민간에서 생장하여 어렵고 힘든 일을 두루 겪었으므로 사람들의 진실과 거짓을 모두 깨닫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온갖 일들의 안녕과 위기를 앞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과 벌이 적절하게 시행되었고, 진실과 거짓이 명확히 구분되었으니,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방법을 알고, 제왕이 행해야 할 것을 체득함이 또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 그들의 재주를 잃게 하지 않았으니, 아랫사람을 거느릴 때는 반드시 그의 능력을 알아보았고, 어진 이를 임용할 때는 믿는 마음을 변치 않았으며, 사악한 사람을 제거할 때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불교를 높이 받들고 유교를 소중하게 여겨 임금으로서의 미덕이 이로써 갖추어지게 되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좋은 계책이 본받을 만했습니다. 다만 창업의 초기로 태평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아 종묘사직이 아직 굳게 안정되지 못했고, 예악 문물에 부족한 것이 많으며, 백관의 품계와 격식, 그리고 내외의 규정과 의례가 미처 갖춰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조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27) 이는 나라 사람의 불행이며, 믿기 어려운 천도()로 참으로 애석하다 할 것입니다.

혜종은 오랫동안 태자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감국()과 무군()28)의 직무를 처리하였으며, 스승을 존경하여 예우하고 빈객()과 관료들을 잘 접견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명성이 조야에 알려져 처음 즉위했을 때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 당시 어떤 사람이 정종의 형제가 반역의 뜻을 가졌다고 참소29)하였습니다. 그러나 혜종은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으며 또한 물어보지도 않은 채, 은혜로 대우함이 더욱 더하여 그를 처음과 같이 대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 분의 큰 도량에 감복하였습니다.

얼마 뒤 덕정()을 닦지 않고 지나치게 자신의 목숨을 아껴, 곁에 항상 무장한 군사를 뒤따르게 하니, 이는 대개 사람을 의심함이 너무 심하여 군주의 체통을 크게 잃은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상()이 장사들에게 치우쳐 혜택이 고르지 못했기 때문에 조정의 안팎에서 사람들의 원망과 탄식이 크게 일어 인심을 잃었습니다. 또한 즉위한 다음 해(944)에 곧 불치의 병을 얻어 오랜 세월을 병석에서 지내셨습니다. 이 때 조정의 신하로 어진 사람은 그 앞에 가까이 가지 못했고 향리()의 소인()30)들이 항상 침실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병이 더욱 위독해질수록 노여움이 날로 더해서 3년 동안 백성들은 그의 덕을 입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혜종이 돌아가시는 날31)에야 겨우 횡액을 면할 수 있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정종은 태자로 계실 때부터 훌륭한 명성이 있었습니다. 혜종이 병석에 누워 오래 동안 회복되지 않자 재신() 왕규() 등이 몰래 모의하여 왕실을 넘보았습니다. 정종이 이를 먼저 알아차리고 은밀히 서도(西)의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는 장군32)과 함께 계책을 정하여 대비했습니다. 내란이 일어나려 하자 호위하는 군사가 많이 도착했으므로 간악한 계략은 실패로 돌아가고 흉악한 무리들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는 비록 천명에 따랐다고는 하나 사람의 계책도 있었으니 어찌 뛰어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정종으로부터 지금까지 38년 간 왕위33)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역시 정종의 힘이었습니다.

정종은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했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였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참()을 그릇되게 믿게 되자 도읍을 옮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굳세어 고집을 굽히지 아니했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도읍34)을 옮기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광종은 뛰어난 용모와 특출하게 영리한 자질로 태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종의 유언을 받고 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아[35)] 보위를 이었습니다[36)]. 아래 사람을 접하는데 예가 있었으며, 사람을 알아보는 데 관찰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종친과 귀족이라고 사정을 두지 않았고, 항상 세력이 강한 자들을 눌렀습니다. 소원하고 천한 사람이라고 버리지 않았고, 홀아비 및 과부 등 불쌍한 이들에게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그가 즉위한 해로부터 8년간 정치와 교화가 맑고 공평하였으며 형벌과 상이 지나치지 않았습니다.37)

쌍기()를 등용한 뒤로부터 문사()38)들을 존중하여 대접이 지나치게 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재능이 없는 사람[]39)이 부당하게 등용되고, 순서를 지키지 않고 별안간 승진하여 채 일 년이 되지 않아서 재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저녁마다 사람을 불러 접견하고, 어떤 때는 날마다 접견하여 의견을 들었습니다[40)]. 이런 일을 기쁘게 생각하고 정사를 게을리하여 나라의 중요한 일은 막혀서 통하지 않고 마시고 먹는 잔치는 이어져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남북용인()41)이 다투어 의탁하길 청하는데 지혜와 재능을 논하지 않고 모두 특별한 은혜와 예절로써 대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젊은 신진들[42)]은 앞을 다투어 나아가고 오래된 신하43)들은 점점 쇠락했습니다.

비록 중화의 교화는 소중하게 여겼지만 중화의 법식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중화의 선비는 예의로 대우했지만 중화의 현명한 인재는 쓰지 못했습니다. 백성에게서는 피와 땀이 서린 재물을 짜내고, 사방으로부터는 실속 없는 칭찬만을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시는 정치에 힘쓰지 않고 빈료()만을 접견하니, 시기만 날마다 깊어 가고 군신 간에 정사에 대한 의논의 길44)은 날로 막혀서 정치적 득실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불사()45)에 너무 의지하고 법문을 지나치게 소중히 여겨 정기적으로 행하는 재()가 이미 많이 베풀어졌는데도, 특별히 발원하는 분향()과 수법()이 적지 않았습니다. 오직 복과 장수를 구하는데 전심하고 기도만을 일삼아 한정된 재력을 탕진하면서 무한한 인연을 만들려 하였습니다. 이는 제왕()의 지위를 스스로 낮추고 사소한 선행만을 즐긴 것입니다. 또한 연회와 놀이에 드나들면서 사치가 끝이 없었습니다. 당장 눈앞에 사고가 없는 것을 불교의 힘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고 생각하여 잘못된 행위를 뉘우쳐 고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대궐은 반드시 규정된 국가의 법제를 초월하여 지었고, 의복과 음식은 모름지기 곱고 얇은 비단을 사용하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 사치스럽게 하였습니다. 토목 사업46)은 농번기를 피하지 않았고, 기이한 물건의 제작은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평상시 일 년의 경비를 대략 계산하면 태조가 십년 동안 쓴 비용이 될 만 했습니다.

또 말년에는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만약 광종이 항상 삼가하고 검소한 뜻을 마음에 새겨 비용을 절감하며 처음과 같이 정사에 부지런히 힘썼더라면, 어찌 그의 복록과 수명이 길지 못하여47) 명이 겨우 쉰에 그쳤겠습니까? 그가 마무리를 잘하지 못했던 일은 참으로 애석합니다. 더구나 경신년부터 을해()년(광종 26, 975)까지 16년간 간악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앞을 다투어 진출하면서 참소하여 헐뜯음이 크게 일어나 군자는 몸을 둘 곳이 없었고 소인만 뜻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자식이 부모를 거스르고 종이 그의 주인을 비난 공격하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마음을 달리하고 임금과 신하의 몸이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래된 신하와 경험 많은 장수[宿48)]들은 차례로 죽임을 당했고 가까운 친인척들은 모두 죽어갔습니다.

더욱이 혜종이 형제를 온전히 할 수 있던 것과 정종이 나라를 잘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 은혜와 의리가 두텁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 두 임금의 조정에는 오직 외아들만이 있었는데, 광종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지 않았으니, 그들의 덕을 갚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곧 다시 그들의 원한을 깊게 맺게 한 것입니다. 또 말년에는 자기의 외아들에 대해서까지 의혹과 시기를 품었습니다. 그래서 경종이 태자로 있으면서 늘 편안하게 있지 못하다가 요행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아아! 어찌하여 처음에 착해서 명망을 얻었다가 뒤에는 착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깊이 통탄할 일입니다.

경종은 깊은 궁궐 속에서 태어나 부녀자의 손49)에서 자라난 관계로 궁궐 문 밖의 일은 일찍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단지 천성이 총명하여 광종의 말년에도 화를 면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즉위하신 뒤에 참소하고 중상한 해묵은 문서들을 불사르고 여러 해 옥에 갇혔던 죄수들을 석방하니 원한과 울분이 모두 없어지고 조정과 민간에서 경사라 일컬었습니다. 다만 정치하는 법도를 알지 못해 권호()50)에게 오로지 정권을 맡겼기 때문에 피해가 종친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재앙의 징조51)가 먼저 나타나 뒤에 비록 깨닫고 뉘우쳤으나 책임이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간사한 것과 정직한 것이 분별되지 않고 상을 내리는 것과 죄를 주는 것이 한결같지 않아 올바른 정치를 하는 데 이르지 못했습니다. 다시 정사를 게을리 하였으며 드디어 여색에 빠져 향악() 연주를 즐겨 관람하다가 뒤에는 장기와 바둑을 종일 두어도 싫증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곁에는 오직 중관()52)·내수()53)들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군자의 말은 들어갈 곳이 없고 소인의 말만 때때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도 일찍이 좋은 명성이 있었으나 말년에는 어진 덕행이 없었으니 이른바 ‘시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끝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54)는 것입니다. 충신의사로서 누군들 이를 원통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친히 보고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경종에게도 칭송할만한 미덕이 있었습니다. 처음 병이 나서 아직 위독하지 않았을 때 침실에서 전하를 접견하시고 손을 잡고 말씀하시면서 나라를 부탁했습니다. 이는 사직의 복일뿐만 아니라 인민의 행복이었습니다. 생각건대 혜종·경종 두 분은 모두 태자로서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사람들이 다른 뜻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형제 사이에 왕위를 계승할 경우에 분명한 부탁이 없으면 반드시 다툼의 단서가 일어났습니다. 혜종은 2년 동안 병으로 누워 있다가 돌아가셨는데 흥화낭군()55)이란 아들을 두고 있었으나 나이 어리고 여러 아우들에게 뒷일을 충분히 부탁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종이 스스로 여러 신하들로부터 추대를 받아 왕위를 이었습니다. 정종은 임종하면서도 일찍이 광종에게 왕위를 전하여 주어 왕실과 사직을 안정시켰습니다. 때문에 정종과 경종 두 임금의 남긴 분부는 현명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살피건대 혜종·정종·광종 세 임금이 서로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는 모든 일이 안정되지 못한 시기여서 개경·서경의 문무 관리들의 절반 이상이 이미 살상되었습니다. 더구나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소가 일어나서 형벌에 연루된 이들은 대부분 죄가 없었고, 역대로 공훈을 세운 신하와 경험 많은 노장들이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경종이 왕위에 오를 때 옛 신하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은 40여 명뿐이었습니다. 그 때에도 피해를 만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모두 후진과 남을 참소한 무리들[56)]이므로 진실로 애석하지 않습니다.

단지 천안낭군()과 진주낭군()은 본래 황실의 자손이어서 광종도 오히려 몸소 관용을 베풀고 마침내 이들을 법으로 처리하지 않았으므로 경종의 재위 기간에 이르러 충분히 왕실의 울타리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권세를 잡은 신하의 피해를 입고 죽어서 지하의 원통한 넋이 되었으니, 어찌 종실[]57)의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돌아가신 선왕께서 장수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불행에서 기인함이 많으니 이런 일은 후세에 경계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상성()의 덕을 가지시고 중흥의 시기를 만났으며, 선대의 왕이 왕위를 겸손하게 물려 준 은혜에 기인하여 역대 왕들의 크나 큰 왕업58)을 계승하시니 하나의 생물도 그의 삶을 즐기지 않은 것이 없었고 한 사람도 그의 거처를 얻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안팎이 함께 기뻐하고 사람과 신이 서로 경하하니, 소위 하늘이 내려 주고 사람들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태조의 유풍을 잘 준수하신다면, 당나라 현종이 문황( : 당나라 태종)을 추모한 옛 일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또 네 조정의 근대 사적에서 본받을 만한 것은 본받고 버릴 것은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곧 혜종께서는 골육을 보전한 공적이 있으니 형제간에 우애의 의리를 가졌다고 할 수 있고, 정종께서는 반란의 싹을 미리 알아서 내란59)을 잘 진정시켜 다시금 왕실과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 왕위를 전수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였으니 지모가 밝았다고 할 수 있으며, 광종의 초기 여덟 해 동안 정치는 3대에 견줄 수 있고 조정의 의례와 제도도 자못 볼 만한 것이 있으니 소위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이 고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종께서는 돌아가신 국왕의 재위 기간에 원통하게 옥살이한 죄수 수천 명을 석방하고 여러 해 동안 참소하여 헐뜯은 문서를 불태우니 소위 너그러운 마음과 인자한 품성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네 조정이 정치한 사적이 대략 이와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잘한 사적을 받아들여 이를 행하고 잘하지 못한 사적을 보고 경계하며, 긴급하지 않은 일을 없애 버리고 이롭지 않은 노역을 폐지하시어 오직 임금은 위에서 평안하시고 백성은 아래에서 기뻐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처음을 잘하는 마음으로써 마침을 잘하는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날마다 삼가 비록 쉴 수 있는 날에도 쉬지 말며, 비록 군주가 되었더라도 스스로 존대하지 말며, 재능과 미덕을 풍부히 가졌더라도 스스로 교만하거나 뽐내지 말고 오직 자기를 공손히 하는 마음을 돈독히 하며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을 끊지 않으시면 복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올 것이고, 재앙은 기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소멸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하의 수명이 어찌 만년이나 되지 않겠으며, 왕업이 어찌 백세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저는 비록 어리석으나 외람되이 국가의 요직에 있으면서 이미 아뢸 것이 마음에 있고 또 회피할 길이 없으므로 삼가 하잘 것 없는 소견을 기록하니, 시무책 28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를 모두 별지로 첨부하여 올립니다.

() 우리나라가 후삼국을 통일한 이래 마흔 일곱 해가 지났으나 병사들이 아직 편안한 잠을 자지 못하고, 군량의 소모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서북쪽이 오랑캐[]60)와 이웃하여 경비할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러한 일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대체로 마헐탄()61)을 경계로 삼자는 것은 태조의 뜻이며, 압록강가의 석성()을 경계로 삼자는 것은 대조()62)가 결정한 것입니다. 장차 이 두 곳 중에 전하께서 마음속으로 판단하여 요충지를 가려서 강역을 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토착인 가운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그 곳의 경비에 종사케 하고, 그 가운데 두 세 명의 편장을 뽑아서 이들을 도맡아 다스리게 하면 경군()들은 교대로 경비하는 고생을 면할 수 있으며, 말먹이와 군량을 급히 운반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덜 것입니다.

() 제가 듣건대, 성상께서는 공덕재()63)를 베풀기 위하여 때로는 친히 맷돌에 차를 갈기도 하고 때로는 보리를 찧으신다고 하시니, 저는 전하께서 친히 근로하시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폐단은 광종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는 불교의 인과응보설에 현혹되어 자신의 죄업을 없애고자 하여, 백성이 피와 땀을 흘려 얻은 재물을 빼앗아 불사()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때로는 비로자나참회법()64)을 베풀기도 하고, 또 구정()65)에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귀법사()66)에서 무차회()·수륙회()67)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에게 재를 올리는 날68)에는 반드시 걸식하는 승려69)들에게 음식을 공양하였고, 때로는 내도량()70)의 떡과 과일을 걸인들에게 내주었습니다. 또 신지()와 혈구(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및 마리산(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등지의 물고기 잡는 곳을 방생하는 장소로 삼아 한 해에 네 번 사자를 보내어 그 지방의 사원에 나아가 불경()을 강설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살생을 금지하여 주방의 고기반찬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게 짐승을 죽이지 말고 시장에서 사서 바치게 하였습니다. 대소의 신민()에게 모두 참회하도록 하여 쌀·잡곡·땔나무·숯·건초·콩을 어깨에 메거나 등에 지고서 서울과 지방의 길가는 사람에 베풀게 한 것이 이루어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벌써 남을 헐뜯는 말을 믿어 사람을 초개와 같이 여겨 베어 죽인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항상 백성이 피와 땀을 흘려 얻은 재물을 다 짜내어 재를 올리는 재원으로 공양하였습니다.71) 이때에 자식이 부모에게 등을 돌리고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며, 여러 범죄자들 중에 모습만 바꾸어 승려가 된 자 및 떠돌아다니면서 빌어먹는 무리들이 진짜 승려들과 함께 섞여 재 올리는 곳으로 오는 자가 많으니,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72)

지금 전하께서 왕위에 있으면서 실행하신 일들이 저와는 같지 않으나, 다만 이런 몇 가지 일들은 전하의 몸을 괴롭게 할 뿐이고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군왕의 체통을 바르게 하여 이득이 없는 일을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 우리 조정의 임금을 호위하는 군졸들은 태조시대에는 궁성을 숙위(宿)하는 일만 맡았을 뿐이어서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광종은 남을 헐뜯는 말을 믿고 장수와 재상들에게 체벌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스스로 의심을 품고 군사의 수를 더욱 늘렸습니다. 주군()에서 풍채 좋은 사람73)을 뽑아 대궐 안에 들여 시위하게 했고, 모두 궁궐의 주방에서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의논은 번잡하고 이로울 것이 없다고들 했습니다. 경종 때에 와서 비록 줄였다고는 하나 지금도 여전히 그 수가 많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태조의 법을 준수하시어 날래고 용감한 사람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그만두게 하여 돌려보내면 사람들 사이에는 원망이 없을 것이고, 나라에는 재물이 비축될 것입니다.

() 전하께서는 장·술·메주·국을 길가는 사람에게 베풀어주십니다. 제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광종을 본받아 죄업을 없애고 널리 베풀어 인연을 맺는 뜻을 본받고자 하시지만 이것은 이른바 작은 혜택으로는 널리 미치지 못한다[74)]는 것입니다. 만약 상벌을 명확히 하여 악한 것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한다면 복을 불러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일은 임금이 정치하는 요체가 아니니 이를 철회하길 바랍니다.

() 우리 태조께서는 큰 나라를 섬기는 일에 마음을 두셨으나, 몇 해에 한 번씩 사신을 보내어 교빙의 의례를 시행할 따름이었습니다. 지금은 사신을 보낼 뿐만 아니라 무역 때문에 오가는 사신이 번다하니 중국에서 천하게 여길까 염려됩니다. 또 왕래하다가 배가 침몰하여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교빙하는 사신에게 무역을75)겸행하게 하고, 기타 때 아닌 매매는 모두 금지하여 못하게 하십시오.

() 모든 불보()76)의 돈과 곡식은 여러 사원의 승려들이 각기 주·군에 사람을 보내어 그것을 관리하게 하고 해마다 이자를 받아 백성을 괴롭히고 소란스럽게 합니다. 청컨대 이를 모두 금지하고 그 돈과 곡식을 사원의 전장()으로 옮겨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주전()77) 중에 전정()을 가진 자는 그것을 거두어 들여 사원의 장()과 소()78)에 소속시킨다면 백성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 줄어들 것입니다.

() 임금이 백성을 다스릴 때 집집마다 가서 날마다 그들을 살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나누어 보내어 가서 백성의 이해를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조인 태조께서도 통일한 뒤에 외관()79)을 두고자 하였으나, 대개 초창기이기 때문에 일이 번잡하여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제가 살펴보건대, 시골 토호들이 늘 공무80)를 빙자하여 백성들을 침해하여 포악하게 굴므로 백성들이 명령을 견뎌내지 못하니, 청컨대 외관을 두기를 바랍니다. 비록 일시에 모두 다 보낼 수 없을지라도 우선 10여개 주·현()을 합하여 한 명의 외관을 배치하고 그 아래 각기 두 세명의 관원을 두어서 백성을 어루만지며 보살피는 일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 제가 살피건대, 성상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굴산()81)의 승려인 여철()82)을 맞이하여 대궐로 불러 들였습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여철이 과연 사람들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사는 곳의 물과 흙도 전하의 소유이고 아침저녁으로 먹는 음식도 전하께서 내려주신 것이오니, 반드시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늘 축원을 일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번거롭게 대궐로 맞아들인 뒤에야 복을 베풀어 주겠습니까?

이전에 선회()83)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요역을 피하려고 출가하여 산에 살았습니다. 광종께서는 그를 극진하게 공경하고 예의를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선회가 길가에서 갑자기 죽어서 그의 시신이 길에 뒹굴었습니다. 그 같은 평범한 승려는 자기 자신도 화를 당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겨를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여철을 산으로 돌려보내시어 선회와 같은 비난을 받지 않게 하십시오.

() 신라 때 공경·백료·서인의 의복·신발·버선에는 각기 품등의 색깔이 있었습니다. 공경·백료는 조회 때 나갈 때는 공란()84)을 입고 천집(穿)85)을 갖추었으나, 조회에서 물러나올 때면 편리하게 옷을 입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무늬 있는 옷을 입을 수 없게 했던 것은 귀천을 나누고 존비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공란은 비록 우리나라에서 난 것이 아니라도 백관들이 스스로 구해 썼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태조 이래로 귀천을 논하지 않고 임의로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관직이 높아도 집이 가난하면 공란을 갖출 수 없고, 관직이 없어도 집이 부유하면 화려한 비단 의복을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물건은 좋은 것이 적고 조잡한 것이 많습니다. 무늬가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난 것이 아닌데도 사람마다 입을 수 있으니, 다른 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 백관의 예복이 법식대로 되지 않아서 수치를 당할까 염려스럽습니다.

바라옵건대 관료들에게 조회에서는 한결같이 중국과 신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공란과 천집을 갖추도록 하고, 일을 보고할 때는 버선신·명주신·가죽신을 신도록 하며, 서인들은 화려한 문양이 있는 깁과 주름이 잡힌 고운 비단을 입을 수 없게 하고 다만 굵은 명주만 입을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 제가 듣건대 승인()들이 군현을 오고 가면서 관·역에 유숙하고 향리와 백성들을 매질하여 그들의 영접과 물건 공급이 더디다고 꾸짖는데도, 향리와 백성들은 그들이 정말 왕명에 따라 출장을 나왔는지 의문이 들어도 두려운 나머지 감히 말하지 못하니, 폐단이 더할 수 없이 큽니다. 지금부터 승도()들이 관·역에 유숙하는 것을 금지시켜 그 폐단을 제거하소서.

() 중국의 제도는 준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습속은 각기 그 지역의 특성을 따르는 것이므로 모두 바꾸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악()·시서()의 가르침과 군신·부자의 도리는 마땅히 중국을 모범으로 삼아서 비루한 습속을 고치도록 하고, 그 나머지 거마와 의복 제도는 토착적인 풍속을 따를 수 있게 하여 사치와 검약을 적절히 할 것이고, 굳이 중국과 같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 여러 섬에 사는 사람들은 그 조상의 죄 때문에 바다 가운데서 생장하고 있으나, 토지에서는 먹을 것이 나지 않아 생활이 매우 어렵습니다. 게다가 광록시(祿)86)에서 시도 때도 없이 물품을 거두어들이므로 날로 곤궁하게 되었습니다. 주·군의 사례에 따라 그들의 공역을 공평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봄에 연등회()87)를 거행하고 겨울에 팔관회()88)를 개최하느라 사람들을 징발해 각종 노역이 대단히 번거로우니, 원컨대 이를 대폭 줄여 백성의 수고를 덜어 주십시오. 또 갖가지 우인()을 만드느라 그 비용이 매우 많이 드는데도 한번 의례에 사용한 뒤 부수어 버리니 이는 쓸모없는 일입니다. 또한 우인은 상례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서조(西)의 사신이 와서 이것을 보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간 일도 있으니, 바라건대 지금부터는 이것을 사용하지 말게 하십시오.

() 『주역』에,89) ‘성인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천하가 화평해진다.’고 하였고, 『논어』에,90) ‘하는 일이 없이 다스리는 사람은 아마도 순임금일 것이다. 그가 무엇을 했는가? 자신을 바르게 하여 조정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고 했습니다. 성인이 하늘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순수하고 한결같은 덕과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마음을 겸손하게 가지며 늘 삼가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지녀 신하를 예의로 대우하시면, 누가 마음과 힘을 다해 나와서는 좋은 계책을 아뢰고 물러가서는 국정을 바로잡아 도울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왕이 신하를 예의로써 부리면 신하는 왕을 충성으로써 섬긴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하루하루를 삼가하여 스스로 교만하지 말고, 신하를 대할 때 공손하며, 혹 죄지은 사람이 있어도 그 경중()을 법대로 논의하시면, 태평의 위업을 곧 기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태조께서는 궁내에 소속된 노비91)가 궁궐에서 공역할 때를 제외하고는 밖으로 나가 교외에 살면서 토지92)를 갈아 세를 바치게 하였습니다.93) 그러나 광종 때에 이르러 불사()를 많이 일으켜 부역이 날로 많아지니 밖에 살던 노비까지 불러들여 부역에 충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궁()의 비용94)으로는 경비 지급이 충분하지 못하여 창고의 쌀까지도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폐단이 전하의 시대에도 아직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또 궁궐 내에서 기르는 말의 수가 많아 비용이 매우 많이 드는 관계로 백성들이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국경에 환란이 있게 되면 군량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태조의 제도에 의거하여 궁궐 안의 노비와 마구간에 있는 말의 수를 적절히 제한하시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내보내십시오.

() 세속에서는 선을 베푼다는 명목으로 각기 소원에 따라 사원을 지으니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또 중앙과 지방의 승려들도 자기가 거주할 곳을 마련하고자 다투어 공사를 행하면서 주군의 장리()95)들에게 백성을 징발하여 부역시킬 것을 권장합니다. 이로 인해 그러한 사역()이 공역보다 급하여 백성들이 이를 매우 괴롭게 여깁니다. 바라건대 엄중하게 이를 금지하여96)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시기 바랍니다.

() 『예기』에, ‘천자의 마루높이는 아홉 척이요, 제후의 마루높이는 일곱 척이다.’고 하였으니, 나름대로 정해진 제도가 있습니다. 근래에는 사람들이 지위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단지 재력만 있으면 모두 집 짓는 일을 먼저하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주·군·현 및 정()97)·역·진도()98)의 세력가들이 다투어 큰 집을 지어 제도를 위반하게 되니, 이는 다만 한 집의 힘을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으로 그 폐단이 매우 많습니다.

바라건대 예관()에게 명을 내려 지위와 신분의 귀천에 따라 가옥의 제도를 적절히 규정해 중앙과 지방에서 이를 준수하게 하고, 이미 지어진 가옥 중에 규정을 위반한 것은 헐어버리게 하여 장래를 경계하도록 해야겠습니다.

() 불경을 베끼고99) 불상을 만드는 일은 단지 오래도록 전하려는 것일 뿐인데 무엇 하러 진귀한 보배로 장식을 하여 도적들의 마음을 자극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예전에는 불경은 모두 누런 종이를 사용하였고 전단목()으로 축을 만들었으며, 그 초상()은 금·은·동·철을 쓰지 않고 돌·흙·나무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훔치거나 훼손시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라 말 불경과 불상은 모두 금·은을 사용하여 사치의 정도가 지나쳤으므로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장사치들은 불상을 훔치거나 부수어 서로 매매함으로써 생계를 삼았는데 최근까지도 그 관습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이런 일을 엄하게 금지시켜서 그 폐단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 옛날 진()나라에 덕이 쇠하자 난()·극()·서()·원()·호()·속()·경()·백() 등의 귀족 성씨100)가 강등되어 천민에 예속되었습니다. 우리 삼한공신()101)의 자손들은 매번102)내린 교지마다 반드시 포상하고 등용한다고 하였으나, 아직 벼슬을 받은 사람 없이 천민에 섞여있으니, 신진 관료들이 업신여기는 행동을 제멋대로 하여 원망과 탄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 광종 말년에는 조정의 신하를 죽이고 쫓아내는 바람에 훈구세가 자손이 제대로 가문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여러 차례 내리신 은혜롭고 너그러운 교지에 의거하여 그 공신의 등급에 따라 자손을 등용하십시오. 또한 경자년(태조 23년, 940)에 전과( : 역분전)를 받은 사람과 삼한() 통일 후에 벼슬살이한 사람에게도 역시 그 공을 참작해 관계와 관직을 준다면 원통하게 쓴 누명을 풀 수 있어 재해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 불교를 존숭하여 믿는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지만, 제왕()·사대부·백성들이 공덕을 닦는 일은 실제로 이와 다릅니다. 서민의 경우 수고하는 것은 자신의 힘이며 소비하는 것도 자기의 재물이므로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왕의 경우에는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소비하게 됩니다. 옛날에 양나라 무제()는 존귀한 천자로서 필부의 선덕을 닦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잘못된 일이라 여겼던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왕들은 이러한 이치를 깊이 고려하고 일마다 모두 중용()을 참작하여 폐단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게 했습니다.

듣건대, 사람의 화복과 귀천은 모두 태어나면서 받는다고 하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물며 불교를 믿는 것은 내세의 인과()만 심을 뿐이며 현세에서 받는 결과[103)]에 이익이 적으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여기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불교·유교·도교의 3교는 각기 중요롭게 여기는 바가 있으니, 그것을 섞어 하나로 묶을 수 없습니다. 불교를 믿는 것은 자신을 닦는 근본이며,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입니다. 자신을 닦는 일은 내세를 위한 바탕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가깝고 내세는 지극히 머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은 또한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은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치우침이 없이 널리 만물을 구제해야 합니다. 어찌 원하지 않는 사람을 노역시키고 창고의 저축을 소비하면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익을 얻어야겠습니까? 옛날에 당나라 덕종() 왕비의 부친인 왕경선()과 부마인 고염()이 황제의 수명 연장을 위하여 금동 불상을 주조하여 바쳤더니, 덕종이 ‘나는 억지로 만든 공덕은 공덕이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라 하고, 그 불상을 두 사람에게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 마음이 실제와 부합하지 못했기는 하나, 신하와 백성들에게 이익 없는 일을 못하게 하고자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우리 조정에 겨울·여름의 강회() 및 선왕()·선후()의 기일재()104)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함부로 취하거나 버릴 수는 없지만, 그 나머지 줄일 수 있는 불교 행사는 줄이길 바랍니다. 만약 줄일 수 없다면, 『예기』의 월령()105)에서 말한 내용을 따르셔야 합니다. 즉 ‘5월 중기( : 하지)는 음기와 양기가 다투고 죽음과 삶이 나누어지는 때이니, 군자는 재계하고 거처함에 반드시 몸을 숨기고 조급하게 굴지 말 것이며, 음악과 여색을 멀리하고 좋은 음식을 적게 먹어 기호와 욕심을 절제하여 심기를 안정시킬 것이며, 모든 관료들은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형벌을 없애서[106)] 음기가 이룩되는 것을 안정시켜야 할 것[107)]이다. 11월 중기( : 동지)는 음기와 양기가 다투고 모든 생명이 움트는 때이니, 군자는 재계하고 거처함에 반드시 몸을 숨기고 조급하게 굴지 말 것이며, 음악과 여색을 물리치고 기호와 욕심을 금지하여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며,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하면서 음기와 양기가 안정되는 것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5월과 11월에는 불사를 정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혹독하게 추우면 일하는 사람이 고통스럽고 음식물이 정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너무 더우면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뭇 독충들로부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으며 재에 받치는 음식이 정결하지 못할 것이니,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또 오늘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해도 내일 반드시 그에 따른 보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정치와 교화를 잘 시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바라건대 한해의 열두 달을 반으로 나누어 2월부터 4월까지와 8월부터 10월까지는 정사와 공덕을 반반씩 시행하시고, 5월부터 7월까지와 11월부터 정월까지는 공덕을 제외하고 오로지 정사만 닦아 날마다 정사를 듣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오후에는 군자가 사계절에 쓰는 의례를 지키면서 정사를 잘 돌보고 몸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시면 계절에 순응하게 되어 성상의 몸도 편안하시고 신하와 백성의 노고도 덜게 될 것이니, 어찌 큰 공덕이 아니겠습니까?

() 『논어』에는 ‘자기가 섬길 귀신이 아닌데도 이를 제사지내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다.’108)고 했고, 『좌전』에는, ‘귀신도 그의 동족이 아니면 제사를 받지 않는다.’109)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잘못된 제사에는 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정에는 종묘와 사직의 제사가 아직도 법식대로 행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산악의 제사와 성수의 초제는 번잡스럽게 지내어 정도를 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제사는 자주 지내지 않아야 하는 법이니, 자주 지내면 번거롭고, 번거롭게 되면 공경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성상께서 마음을 맑게 하고 공경을 다하여 진실로 게으른 태도가 없다고 하나, 향관( : 제사를 맡은 관리)들이 으레 하는 일이거니 여겨 싫증이 나서 공경을 다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그 제사를 흠향하겠습니까?

옛날 한나라 문제()는 제사지낼 때에 해당 관리들에게 공경히 지내되 복을 빌지는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 식견은 탁월하여 훌륭한 덕이라 할 만합니다. 가령 천지신명이 사사롭게 복을 비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복을 내릴 수 있겠으며, 만약 사사롭게 복을 비는 것을 안다면 이는 자기 이익을 챙기고 잘 보이길 바라는 일로 군자를 기쁘게 하기도 어려울 것인데 천지신명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제사의 비용은 모두 백성의 고혈과 부역에서 나오는 것이니, 저의 어리석은 생각에 만일 백성의 부역을 쉬게 하여 환심을 얻는다면 그 복은 반드시 빌어서 얻는 복보다 많을 것이라 여깁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별도의 법식으로 하는 기도와 제사를 없애고, 늘 스스로 공손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품어 그것이 하늘에 이르면, 재해는 절로 물러가고 복록은 절로 오게 될 것입니다.

() 우리 조정에서 양인과 천인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창업한 초기에 여러 신하들 가운데 본래 노비를 소유했던 사람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본래 소유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종군하여 포로를 얻거나 재화로 사서 노비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태조께서 일찍이 포로를 풀어주어 양인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공신의 뜻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편리한 대로 따르도록 허락하였는데, 예순 남짓한 해가 지나도록 호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광종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노비를 조사110)하여 그 시비를 가리게 하니, 이에 공신들이 탄식하고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간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대목왕후()께서 간절히 간하였지만 임금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천한 노비들이 뜻을 얻어 존귀한 사람들을 능멸하여 업신여기고, 앞 다투어 허위 사실을 꾸며 본래의 주인을 모함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광종은 스스로 화의 원인을 만들어 놓고 그 피해를 막지 못했으며, 말년에 이르러 억울하게 사람을 죽여[111)] 덕을 크게 잃었습니다.

옛날 후경()112)이 양나라의 궁성을 포위하니, 임금의 측근인 주이()의 집 종이 성을 뛰어넘어 후경에게 투항하였습니다. 후경이 그 종에게 의동()113)이라는 벼슬을 주자, 그 종은 말을 타고 비단 옷을 걸치고서 성으로 가, ‘주이는 50년간 벼슬살이하여 겨우 중령군()이 되었으나, 나는 후왕에게 처음 벼슬살이하여 벌써 의동이 되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이에 성안의 종들이 다투어 나와서 후경에게 투항하므로 궁성이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난 일을 거울삼아 천한 노비들이 귀한 이들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시고, 노비와 주인과의 관계를 적절히 처리하도록 하십시오. 대개 벼슬이 높은 사람은 도리를 알아서 법에 어긋난 행위가 적으며, 벼슬이 낮은 사람도 단지 그의 지혜가 충분히 자기의 나쁜 짓을 덮을 수 없다면 어찌 양인을 천인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궁원()과 공경() 가운데, 위세로써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혹시 있다 할지라도, 지금의 정치가 거울처럼 밝고 사사로운 것이 없으니 어찌 거리낌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주나라의 유왕()과 여왕()이 도를 잃었다 하여도 선왕()과 평왕()의 덕을 가릴 수 없었으며, 한나라의 여후()가 덕이 없다 하여도 한나라의 문제()와 경제()의 어짐에 누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 판결을 주관하시면서 중요한 일은 상세하고 명백하게 하여 후회가 없도록 할 것이며, 앞 시대에 판결한 사건은 자꾸 캐내고 따져서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단서를 열지 않아야 합니다.”

최승로는 왕이 뜻을 가지고 있어 함께 좋은 정치를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글을 올렸다. 위의 스물 두개 조항 이외, 나머지 여섯 조항114)은 사서에 전해지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승로 [崔承老]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