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긴메이[欽明] 13년(552) 10월, 백제의 성왕에게서 석가상·경론 등이 전해졌다. 천황은 기뻤지만, 군신들에게 예배의 가부를 물었더니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는 수용을 주장하고,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興]와 나카토미노 가마코[中臣鎌子]는 반대했다. 그래서 이나메 혼자 예배하는 것을 허가했다. 이나메는 불상을 오와리다[小墾田]의 집에 안치하고, 무쿠하라[向原]의 집을 절로 만들었다. 그 후 나라에 역병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코시와 가마코의 상주에 따라 불상을 나니와의 호리에[堀江]에 버리고 가람은 불태웠다. 그러자 비구름이 없는데도 천황의 궁전이 소실되었다.
② 비다쓰[敏達] 13년(584) 소가노 우마코는 시바 다쓰토[司馬達等]의 딸(젠신니[善信尼]) 등 3명을 출가시키고, 가후카노오미[鹿深臣]가 백제에서 가져온 미륵 석상을 집 동쪽에 불전을 지어 안치했으며, 3명의 비구니를 불러 설재(設齋, 음식을 준비하여 승니를 공양하는 것)했다. 그때 재식(齋食, 식사) 위에 불사리가 출현했기 때문에 시바 다쓰토 등은 그것을 우마코에게 헌상했다. 우마코가 그 사리를 쇠망치로 쳤으나 부서지지 않았고, 물에 넣으니 제멋대로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 그래서 우마코는 이시카와[石川]의 저택에도 불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불법의 시초라고 한다.
③ 비다쓰 14년(585) 2월 소가노 우마코는 오노[大野] 언덕 북쪽에 탑을 세우고 탑두에 사리를 봉안했다. 얼마 후 우마코가 병에 걸렸다.점쟁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아버지 때 신봉했던 신불이 내리는 벌이라고 하여 더욱 석상을 예배했더니, 나라에 역병이 돌아 많은 백성이 죽었다. 그래서 동년 3월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와 나카토미노 가쓰미[中臣勝海]가 상주를 하자 천황은 불법의 정지를 선언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불상·불전을 불태우고 타다 남은 불상을 나니와의 호리에에 버렸으며, 젠신니 등을 붙잡아 욕보이고 매로 때렸다. 그러자 천황과 모리야가 갑자기 종기가 났고 많은 백성도 병으로 죽었다. 사람들은 불상을 불태운 죄라고 했다. 이에 동년 6월 천황은 3명의 비구니를 우마코에게 돌려주었지만, 얼마 후 천황은 병으로 죽었다.
④ 요메이 2년(587) 4월 천황은 병에 걸려 삼보에 귀의할 뜻을 밝혔지만, 모노노베노 모리야와 나카토미노 가쓰미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종기가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천황이 죽었다. 이에 곧바로 황위계승을 둘러싼 대립이 일어나 소가노 우마코는 여러 호족을 모아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죽이고, 스슌[崇峻]천황을 즉위시켰다. 싸움에 임할 때 우마야도왕은 백교목(白膠木, 붉나무) 사천왕상을 만들어 머리에 꽂고 사탑(寺塔)의 건립을 맹세했으며, 우마코도 마찬가지로 맹세했다. 그것이 훗날의 시텐노사[四天王寺]와 아스카사다.
⑤ 스이코 2년(594) 2월 천황은 황태자(우마야도왕·쇼토쿠태자)와 대신(소가노 우마코)에게 삼보흥륭의 조칙을 내렸다. 호족들은 앞다투어 절을 지었다고 한다. 또 동 12년(604) 황태자가 만든 헌법 17조에도 ‘삼보를 독실하게 공경하라’고 되어 있다. 이에 왕권과 불교는
일체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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