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4일 화요일

초기국가 - 삼국지 위서 부여전

부여는 장성(만리장성)의 북쪽에 있고 현토군에서 천리쯤 떨어져 있으며,
남쪽에 남쪽에 고구려, 동쪽에 읍루, 서쪽에 선비(족)와 접해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으며,
(국토의 면적은) 사방으로 이천 리다.
호 수는 팔만이고
그 나라 사람들은 정주생활을 하며,
궁실, 창고, 감옥을 두고 있으며,
산과 언덕, 넓은 연못이 많고
동이 지역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은 곳이다.
토지는 오곡이 자라기에 적당하지만,
오과는 자라지 못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몸집이 크고
성품이 굳세고 용감하고 근엄하고 후덕하며,
(그래서) 노략질을 하지 않았다
그 나라에는 군왕이 있고
모두 여섯 가지 가축의 이름을 관직명으로 하여,
마가․우가․저가․구가․견사가 있는데, 견사는 사신(심부름꾼)이다
읍락에는 호민이 있고
백성은 하호라 하며,
모두가 종이다
여러 가들은 따로 사출도를 다스린다.
큰 곳은 수천 집이며
작은 집은 수백 집이다.
음식을 먹을 때 모두 나무 그릇을 쓰며,
함께 모일 때는 서로 술잔을 주고 잔을 씻으며,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몸을 폈다가 굽혔다가 한다.
은나라의 정월에는 하늘에 제를 지내는데,
나라의 가장 큰 모임이다.
날마다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를 ‘영고’라 하였으니
이 때는 형벌을 그치고,
죄수를 풀어 준다.
이 나라의 옷은 흰 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된 큰(넓은)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에 수를 놓은 옷이나 털옷을 즐겨 입고
대인은 여우, 살쾡이, 원숭이, 휘거나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덧입기도 하며,
금은으로 모자 장식을 한다.
역인이 말을 전할 때는 모두 무릎을 꿇고,
손으로 땅을 짚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형벌은 엄하고 급하게(혹독)하고,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 사람들은 모두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한 자는 그것의 열 두 배를 갚아야 한다.
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를 하면, 모두 사형에 처한다.
(부인이) 투기하는 것을 더욱 미워해서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나라의) 남산 위에 던져두고,
썩어 문드러지도록 내버려둔다.
친정에서(그 부인의 시체를) 거두려고 할 때,
소와 말을 바쳐야만 (보내야만) 그 시체를 내어준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이것은) 흉노들과 같은 풍습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짐승을 잘 기르고,
명마와 붉은 옥과, 담비와 원숭이 가죽, 아름다운 구슬이 나는데
구슬의 크기는 멧대추만 하다.
활과 화살, 칼과 창을 병기로 하고,
집집마다 스스로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있다
그 나라의 노인들은 옛날 자신들이 (다른 곳에서) 망명해 왔다고 말한다. .
성책은 모두 둥글게 지어,
감옥처럼 보인다.
길에 다닐 때는 밤이나 낮이나 늙은이, 젊은이할 것 없이 노래를 불러,
하루종일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전쟁이 일어나면 또한 하늘에 제를 올리고,
소를 잡아 그 발굽을 살펴서 이로써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붙으면 길하다고 믿는다.
적이 침입하면 제가들은 모두 모여 스스로 전쟁에 참전하고
하호들은 양식을 져다가 (군사들의) 음식을 만들어 준다.
사람이 죽으면 여름철에 모두 얼음을 넣어 장사지내고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을 때는 백여 명이나 된다.
장사를 후하게 지내는 때는, 관은 쓰지만, 곽은 쓰지 않는다..
위략에서 말하자면
그 나라 습속에는 초상을 다섯 달을 지내며
오래 될수록 영화롭게 여긴다.
그 죽은 이에게 제를 올릴 때는,
날 것 ,익힌 것 가리지 않고 쓴다.
상주는 빨리 하지 않으려 하나,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그것(빨리 치르는 것)을 강요하고,
언제나 실랑이를 벌이는 것으로 예절을 삼는다.
상주는 남녀 모두 순백의 옷을 입고
(상주의) 부인이 되는 이는 베로 만든 면의를 쓰며
반지나 패물을 지니지 않는데,
(이것은) 대체로 중국과 더불어 비슷하다.
부여는 본래 현토군에 속한다.
한말, 공손도가 해동에서 세력을 키워서
외이들을 위엄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했다.
이 때 (고)구려와 선비(나라 이름)가 강성하여
(공손)도는 부여가 이들 두 나라 사이에 끼여 있음을 보고
왕실의 딸로서 처를 삼게 하였다.
위구태왕이 죽자,
간위거가 왕이 되었다.
(간위거는) 적자가 없고,
얼자인 마여가 있었다.
위거가 죽자,
제가들이 함께 마여를 왕으
우가의 형의 아들 이름도
대사가 되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잘 베
나라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해마다 (위나라) 서울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정시 해(위 제왕의 연호 : 240 - 248년) 중순에
유주자사인 모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면서
유현토태 수왕기를 부여에 보냈고,
위거는 견사를 보내어 교외에서 (왕기를 ) 맞게 하고, 군량을 보내었다.
(위거의) 계부인 우가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는 계부 부자를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사신(조사관)을 보내어 재산 목록(부렴)을 만들어 관에 보내었다.
옛 부여의 풍속에
장마와 가뭄이 연이어
오곡이 익지 않을 때
그때마다 왕에게 허물을 돌려서
B 혹은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혹은 ‘왕은 마땅히 죽어야한다’고 하였다.
마여가 죽자
그의 아들인 여섯 살 박이 의려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한나라 때, 부여왕의 장례에는 옥갑을 사용했으므로
항상 현도군에 미리 가져다 주었다가
왕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례를 치렀다.
공손연이 주살된 뒤에도,
현토군의 창고에는 옥갑 한 벌이 남아 있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으로 만든 벽, 규, 찬등 여러 대를 이어
전해오는 물건이 있어 이를 보물로 여기는데,
노인들은 ‘선대(의 왕)께서 하사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략에서 말하기를
그나라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일찍이 (적에게) 파괴된 적이 없었다.
그 도장에 ‘예왕지인’이란 글이 있는데
나라 가운데에 예성이란 이름의 옛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 예맥의 땅인 것을,
부여가 그 가운데서 왕이 되었으므로,
자신들이 스스로 ‘망인(망명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듯 하다.
위략에서 말하기를
옛 기록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옛 북방에 고리란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여서
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
시녀가 말하기를
“달걀과 같은 크기의 기운이 내게 내려와 임신하였다.“고 하였는데
뒤에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왕은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김을 불어넣어 (아이가 죽지 않았고)
마굿간에 버렸으나,
말이 입김을 불어넣어
(아이가) 죽지 않았다.
왕은 (그 아이를)천자의 아들로 여겨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하여
항상 말을 기르게 하였다.
C 東明善射(동명선사) D 동명은 활을 잘 쏘아서
C 王恐奪其國也(왕공탈기국야) D 왕은 자신의 나라를 빼앗길까봐
C 欲殺之(욕살지) D 동명을 죽이려 했다.
C 東明走(동명주) D 동명은 남으로 달아나
C 南至施掩水(남지시엄수) D 시엄수에 이르러
C 以弓擊水(이궁격수) D 활로 물을 치니
C 魚鼈浮爲橋(어별부위교) D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고
C 東明得度(동명득도) D 동명이 물을 건넌 뒤
C 魚鼈乃解散(어별내해산) D 물고기와 자라는 흩어져 버렸고
C 追兵不得渡(추병부득도) D 추적하던 군사는 물을 건너지 못했다.
C 東明因都王夫餘之地(동명인도왕부여지지)


     D 그리해서 동명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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